거기엔 아무도 없었음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작 내가 기억해 낸 건, 그녀와 지구본이었다.
***
지금 여기는 고등 학교의 과학실. 방과후에 한산한 여름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팽그르르 바람과 함께 돌아가는 커다란 지구본. 그녀는 살짝 웃으며 검지 끝으로 그걸 멈추곤했다. 여기. 거기가 어딘데. 어딘지는 나도 몰라. 일종의 취미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항상 지구본에 한 곳을 무작위로 짚으며 그곳에 가고파했다. 정작 어디인지도 모른채. 그저 미지의 어느 곳을 우연의 손짓으로 가리키며.
썰스데이 아일랜드.
의류 브랜드 이름이었다. 백화점이라도 가자는 말이야.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런 게 아냐. 지금 내가 가리킨 곳이 썰스데이 아일랜드라는 곳이야. 파푸아 뉴기니와 호주 사이에 있어. 어느 나라 땅인지는 모르겠다. 거기에 가고 싶어. 응. 어째서. 이유는 없어, 세상엔 이유없이 가고 싶은 경우도 있는거야. 이유가 없다는 그 말을 곱씹어봤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고개를 잠시 도리질 해보고 ‘그런 것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것이 있을리는 없겠지’ 고등학교 때, 더벅머리를 한 나는 그렇게 생각 했었다.
지구는 여러번 자전을 거듭했다. 수천번의 자전. 지구본이 내 기억의 바람에 흔들리 듯, 지구도 나도 그만큼이나 흔들려야했다. 마치 그렇게 흔들려야만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어떤 이유가 정말 있었을까. 그녀의 손가락 끝이 지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 여기는 어딜까. 결혼. 그녀가 말 끝을 올렸다. 몇살이지 난. 어리둥절한 채, 결혼을 하자고 말을 꺼낸 나만이 있다. 기억이 뒤섞여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만든 허상일까.
침묵하는 자아의 입술 아래로, 그녀의 말이 새어나왔다. 좋아. 단순하고 명료한 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은 항상 그랬다. 모든 과정의 숲은 이끼낀 듯 난잡하고, 그 숲을 빠져나온 햇살만이 눈부셨다. 기억은 항상 그랬다. 그 크고 성긴 그물에, 중요한 것들은 모두 내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만 이음새에 살풋 걸어두곤 했다. 그것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런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어. 썰스데이 아일랜드 기억해. 미안, 기억이 안나. 오래전 일이야. 갑자기 생각난거야. 그곳으로 가고 싶어. 응. 호주 최북단에 있는 섬이야. 어디라도 좋아 네가 가고픈 곳이라면. 그런데 거기에 가고픈 어떤 이유가 있어.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마치 지구가 자전을 멈출 수 없다는 듯이. 오늘 달과 별이 뜨는데 설명이 필요하냐는 듯이.
난간의 저 아래로, 층계참을 내려가듯 허공에 네가 걸려있다. 손을 흔들어봤다. 나를 보는데, 사실 나를 보지 않는 것만 같았다. 팔년의 세월만큼 천천히, 천천히 그녀가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곧 무서운 소리를 내며, 거기로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허상처럼 흩어질 것인지. 여기는 어디. 지구본을 팽그르르 돌려봤다.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 나는 난간에 한 중심에 서 있다. 구두를 겨우 놓을만한 공간이 마치 삶과 죽음을 나누는 작은 선 같았다. 느리게 떨어지는 널 보고있다. 이제와 이곳까지 온 이유가 무에 중요할까. 그런 구구절절하고 지리멸렬한 것들이 뭐 중요할까. 세상은 어차피 결과만이 명료한 것인데. 남은 건 그것 뿐인데.
지구는 다섯번 더 자전했다. 아니 서른번이었던가. 아니 백번이었던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지만 지구가 자전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에 어떤 이유가 있었을런지. 혼탁하기만했다.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케언즈까지 가야했다. 거기서 다시 혼 아일랜드로. 혼 아일랜드에서 다시 썰쓰데이 아일랜드로. 그렇게 여러 관문을 거쳐서. 몇개의 고개와 빡빡한 기억을 해쳐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경비행기를 탔다. 혼 아일랜드에 내렸을 때, 문득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궁금했다. 팽그르르. 어디쯤이니. 거의 다 와가. 제대로 가고 있는걸까. 거의 다왔으니까, 아직 조금은 더 살아도 돼. 나는 웃었다. 웃어버리면 더 말하지 않아도되므로.
아시아인 인가요. 얼굴이 넓적하고 코가 큰 남자가 다가왔다. 그런데요. 서툰 영어가 새어나왔다. 그는 말이없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다 알 수 있다는 듯. 공항엔 사람이 없었다. 방금 타고온 경비행기에도 겨우 셋이 있었을 뿐. 안내 데스크를 돌아봤다. 비어있다. 완연히 비어있다. 두리번 두리번 여기 저기를 살펴봤다. 낯선 풍경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이런말 하는게 이상하지만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 어째서. 그녀는 그저 웃었다. 새하얀 백의가, 그녀 뒤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웨딩 카탈로그 사진에 찍힌 그녀의 얼굴이 한없이, 슬펐다는 걸 나는 이제서야 알았다. 그런데 혜연아. 나는 네 이름을 불렀다.
왜.
거기엔 어떤 이유가 있었던거니. 길을 잃으신 것 같은데요. 아까의 코가 큰 어보리진 남성이 내 옆에 있었다. 아마도요여기가어딘지는아시죠아마도요가는곳은어디신데요. 썰스데이 아일랜드. 명료하게 한마디가 울렸다. 난간 아래로 말들이 퍼져나갔다. 거긴제고향이에요어떻게가야하죠살아서갈수있는곳인가요페리를타고가면돼요조금있으면페리가도착할거거든요페리는어떻게타야하죠택시를타고선착장까지가면돼요이름이뭔가요현석이요저는톰이요톰이라고불러주세요
톰
현석
그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다. 이상스러울만큼 정확하게. 킴이라고불러주세요현석이라는이름은어려우니까요그럴게요우선택시부터타죠. 나는 택시가 있는 승강장까지 걸었다. 공항 밖 한켠 택시가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난 네가 여기에 올줄 알았어, 넌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던거야. 택시에 올랐다. 톰이 선착장으로 가자고했다. 택시 차창에 어리는 풍경들을 바라봤다. 사념들이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어 한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야자수가 높이 서 있었다. 그 끝, 코코넛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진실한 삶의 열매같았다. 마치 삶이란 그 극단까지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듯이. 코코넛이 어디있는지는 꼭대기에 올라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느새 부둣가에 도착했다. 짐들을 내렸다. 기억들을 페리에 실었다. 미련들을 품고 페리가 출발했다. 섬에는 왜 혼자 오셨어요. 그냥요. 이상하네요, 별달리 볼 것도 없는 곳인데. 이유없는 여행도 세상에는 존재할지 몰라요. 푸르르르, 페리가 옅은 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혼아일랜드는 멀어지고, 썰스데이 아일랜드는 가까워졌다. 저기 저 먼곳, 페리의 끝에는 그녀가 발끝을 모으고 날 기다려줄까. 또 다른 선착장에 내렸다. 둘은 같은 곳인데, 서로의 결과만이 다르다. 좋은 여행하시길. 지금은 많이 더우니까, 한낮에 밖에는 자주 나오지 마시구요. 고개를 끄덕였다. 철썩이는 파도가, 제티 위에 퍼졌다. 푸르고 푸른 물결이었다. 톰여기는어딘가요여기가썰스데이아일랜드에요저는제대로온건가요어디를말이죠죽지못할이유에죽지못할이유라니요여기가죽지못할이유라면죽어야할이유는어딘가요.
팽그르르르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지구 사이에, 지구본이 돌고, 그 지구본 사이에 갇힌 기억이 회전했다. 너 한번 크게 한탕해보지 않을래. 한탕이라뇨 선배. 고객들 돈 관리하는 걸로 아는데 그걸로 주식한번 해보자.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그쪽이라면 꽤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살이 그리 쉽게 믿을 수 있는것인가. 선배, 제 돈이 아닌걸요. 확실한 정보라서 그래. 나는 나대로 투자를 할거야, 하지만 총알이 너무 적어. A제지라고 들어봤냐. 코스닥 상장 기업이야. 들어봤어요. 이번에 유전 개발에 투자를 많이 했거든, 근데 곧 나올거라는 이야기가 있어. 누가 말했나요 선배한테는. 믿을만한 사람한테. 결국 믿을만한 사람이기에 우리는 믿음을 배신당하는 건지도. 거기에도 이유가 있는걸까.
때때로 삶의 시련은, 마치 거대한 파도같이 한번에 다가왔다. 장마가 오기도 전에 미친듯이 쏟아지는 폭우처럼. 결혼을 앞두고 나서야 터진 그 일. 욕심이 과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삶이 이리 파괴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있다. 그러나 그것말고 네 삶이 파괴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현석씨 나 요즘 부쩍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근데 이상해, 정말 죽고 싶은게 아니라, 나 자신의 무언가를 없애고 싶은거야. 이해할수 있어 내 말.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고개를 끄덕여 왔으므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에는 논쟁을 하지 않았으므로.
팔년이나 너와 몸을 부대끼고, 살을 섞고, 서로의 마음과 몸 구석구석을 다 안다고 믿었는데. 아무래도 닿지 못할 곳은 너도 나도 있었는지. 정작 너는 너가 죽이고픈 그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죽였고. 나는 너를 다시 빚어내야만했다. 지구본 안에 있던 너를 끄집어 내서라도.
결혼을 하기 얼마 전이라서 그런걸거야. 아냐 아무런 이유가 없는거야. 네가 썰스데이 아일랜드에 가고 싶었던 것처럼. 응. 그런데, 나 정말 이상해. 괜찮아, 그럼 너 자신을 둘로 나눠. 그리고 그 안에서 없애고 싶은 너를 죽이면 되잖아. 아무래도 이해시킬 수 없는 말이었나보다. 너에겐. 그리고 나에게도. 킴뭘그리혼자말해요옛날생각이났어요여기가어디죠썰스데이아일랜드요제고향그렇군요기약의장소에요기약의장소요같이오기로했거든요누구랑요누군가와어째서요어째서든어디로갈거에요이제숙소를찾아야할것같아요그럼날따라와요내가어디로가야할지알아요.
나는 톰의 발에 내 마음을 겹쳤다. 더 이상 나 혼자 생각하기엔 머리가 아파왔으므로. 숙소에 짐을 풀었다. 트렁크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짐들이 간소했다. 일회용 면도기, 속옷 몇벌, 수건 여러장, 갈아입을 여벌의 옷들, 세면도구, 한권의 책. 이다지도 가볍고 짐이 없었다니. 이 커다란 가방이 이렇게나 비어있었다니. 문득 서울에서의 내 브리프 케이스를 기억해냈다. 무척이나 무거웠다. 너무나도 많이. 클라이언트들의 욕심이 그 안에서 드글드글 끓고 있었으므로. 톰이 방문을 열었다.
밥은요.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좀 먹어야하지 않을까요.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렇게 망연히 앉아있었다. 하루 종일 그대로 있었던 것 같았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랬던 것 같았다. 선배가 죽었다. 이게 선배가 말하는 책임이었어요. 내 꺼진 전화기에, 그에게 건 일백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닿지 못한 전파 끝, 아마 거기는 죽음이었나보다. 선배의 마지막 문자는 미안하다. 나도 몰랐어. 였다. 책임이 될지 모르지만, 책임이라고 생각하마.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라면, 그가 죽어서라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말할 것이었으므로. 아냐 선배. 아무래도 그런건 책임이 아냐. 그냥 선배는 그렇게 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을 뿐이야. 라고 나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 목구멍으로 넘기는 얕은 생명의 증거들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 날, 꽃등이 지는 초라한 장례식장을 나왔을 때. 나는 죽음과 삶이 맞닿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간에 구둣발을 한발 옮겼다. 등 뒤로는 삶이, 내 앞으로는 죽음이. 살아간다는 건 이다지도 얕고 좁은 곳에 발을 디딘 것. 썰스데이 아일랜드, 다시 지구본을 돌렸다.
저녁을 먹지않고 숙소에 앉아있자 그가 밤바다를 보러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검고 어두운 세계에 퍼졌다. 침잠하는 섬에 한 켠에 나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들려요킴뭐가요저기돌고래들의소리가요파도소리밖에안들려요좀더멀리봐요보일거에요돌고래가요바다한가운데서뛰는것들이요아이제보여요. 바다에 중심에 돌고래들이 작은 춤을 추고 있었다. 굽은 모양의 활처럼 튀는 그들의 운무. 생명의 약동과 몸짓. 살아있다는 것을 그렇게 온몸으로 증명하는 시위. 나는.
살아있다는게온몸으로느껴져요네그럴거에요톰저들은왜춤을추고있을까요이밤바다에서글쎄요그럴만한이유가있어서일까요그이유는뭘까요아뇨킴그런건아닐거에요그게아니라니요딱히이유가있어서는아닐거에요그럼요그냥존재하는거에요살아있다는건그런거에요그저그것만으로도우리가온몸으로느낄수있는거에요그이유는요어쩌면없을지도몰라요내가이섬에온것처럼요어쩌면요중요한건당신과내가이밤바다에앉아저살아있는돌고래들을바라보고있다는것이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이 진실하므로. 그러나 또다시 진실한 것 하나. 지구본을 다시 돌려야했다. 아픈 소리를 내며 축이, 내 가슴이 피흘리며 지금 돌아갔다.
더는 죽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는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이유없이도 하는 여행이라는 그녀 말처럼, 그 이유없는 죽음은 내게 끊임없이 이유를 물어왔다. 납득이 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백을 매울 길이 없어, 거기에 내 고갯짓을 더했는지도 몰랐다. 돌고래의 운무처럼 그녀의 죽음은 불가해한 것이었다. 왜. 라는 말은 수천번도 더 되뇌어봤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애초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다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저 멀리 그녀의 손떼묻은 지구본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있었다. 흔들리는 세계속에 더는 네가 없다는 건,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물었다.
톰살아있다는건뭘까요삶과죽음의경계는뭘까요목적이없는생이이유가없는죽음이가능할까요.
그는 그저 웃었다. 가라앉는 밤의 적막이 바다처럼 세상에 내려앉았을 뿐. 나도 그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내려앉는 세상에 바다처럼 적막이 밤에 가라앉았을 뿐. 사라질듯 옅어지는 그 풍경속에, 어느새 그녀가 살금 발을 들였다.
현석씨. 지금 어디야. 썰스데이 아일랜드, 너랑 오기로 했던 곳. 거기가 어디야. 내가 지구본으로 가리켰던 곳이야. 아니 거긴아냐. 아무래도 거기가 아닌 것만 같아. 그럼 당신은 지금 어디야
지구본을 돌려보지만, 이제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킴왜요톰별이보여요네별은왜존재하는걸까요글쎄요그냥거기에있는게아닐까요마찬가지로요킴네살아간다는건말이죠네어떤이유나목적을필요로하지않는게아닐까요별처럼요네그냥존재하는거에요아무런이유없이내가이섬에온이유처럼요네그런데그이유없는존재에는어떤이유가있을까요아무이유가없다는이유요. 나는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네가 죽은 이유를 찾으러왔어. 아무래도 이유는 없는걸. 그럼 그 없는 이유를 확인하러 왔어. 그 섬에 그 이유가 있을까. 아니 없을거야. 그럼 왜. 없는 걸 보러온거야. 아무 것도 없는 그걸.
이튿날 톰은 나를 포대로 이끌었다. 이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그 포대는 여전히 오지 않을 적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녹슨 포대의 포신이 마치 깃대같았다. 기억에 깊이 꽂혀있는 쓰러진 깃대. 톰왜이포대는아직있는거죠이차대전때세운거에요전쟁은끝났어요이제포가존재할이유는없는거잖아요킴네그냥존재하고있을뿐이에요한때는존재의이유가있었을지몰라요하지만지금은아니겠죠그냥그건존재하고있을뿐이에요목적없이목적을잃은채그것으로도설명이되지않나요이해하기힘들어요세상에는요이유와목적이없는삶도있지않을까요비어버린그대로요잃어버린그대로요나처럼요.
톰은 그저...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납득하지 못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므로. 목적없는 삶이, 이유없는 존재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으므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무관심의 고개가 아닌 이해의 고갯짓을. 나는 물었다.
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요. 생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건 대체 뭘까요.
킴.
지금 당신과 내가 이 땅위에 발을 디디고 저 멀리 바다를 보고 있어요. 당신은 끊임없이 생에 대해서 고민하구요. 그래요, 이제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 말만을 나누고 나는 숙소로 내려왔다. 그리고 말없이 페리가 있는 선착장으로 내 몸을 이끌었다. 부두에 한켠에서 그와 인사를 나눴다. 페리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리고 페리가 양끝단의 제티에 한 중앙에 있을 때 쯤, 나는 저 멀리 선착장을 돌아봤다.
그녀가 두 발끝을 세운채 서글프게 날 보고있었다. 눈을 한번 비볐다가 나는 웃었다. 웃어버리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손님 아무도 없는 곳을 왜 그렇게 오래 보세요. 이제 멀어지는 선착장에 몇마리의 갈매기가 구슬픈 울음을 짓고 있었다. 선착장엔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걸 나는 지금에야 깨달았다.
팽그르르. 기억과 현실의 한 지점에서 지구본이 다시 돌아간다. 현석씨 지금 어디야. 곱고 예쁜 그녀의 손가락이 지구본을 쓴다. 길고, 가녀린 그녀의 목을 보며 나는 그녀의 옆에 선다. 하얀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잡고, 그녀의 검지를 펴게한다. 그리고 돌아가는 지구본에 한 점을 가리키고는, 멈춰선 그곳을 보며 말한다.
“삶의 한 가운데”
지금 난간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