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우 Jun 24. 2019

[단편소설]에스콰이어 구두

당신에게도 삶은 지옥이겠지

이번 달도 적자다. 시계를 사지 말았어야 했는데, 친구 녀석의 눈빛 때문에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 진짜야?” 별 생각 없이 묻는 그 물음에는, 네가 그런 걸 살 능력이 안 될 텐데라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그 순간 진짜라고 대답하면서도 내 등에서는 작은 소름이 돋았다. 혹시라도 레플리카인 걸 알아보면 어쩌나하고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인 건 알고 있다. SA급 레플리카로 정품의 1/10의 가격을 주고 산 물건이다.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결코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레플리카라고 해도 가짜는 가짜일 뿐. 결국 붓고 있던 적금을 깨 시계를 사고 말았다. 오메가 씨 마스터. 현찰로 삼백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으니 결코 싼 시계는 아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니 만 이천 원이 남아있다. 이번 달 알바비까지 가불 받아썼으니, 이달 생활비가 빠듯하다. 생각을 거듭 해보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종수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운을 떼자, 어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물으셨다. “그래, 면접은 잘 봤구?”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취업 준비생이 된지 이제 만 삼년 째다. 그 삼년 동안을 거짓말만 하고 살았다. 서류를 내 본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면접에 가본적은 없었다. 어학 성적 하나 없는 나를 받아줄 기업은 없었고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삼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거짓말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저번에 통화했을 때 나는 뭐라고 둘러댔던가. 어느 회사에 면접에 갔다고 말을 했더라. 생각이 가뭇없이 흩어졌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 보았다고 대답했다.


“어때, 이번에는 될 거 같냐?”

“그거야 제가 알 수 있나요. 면접관들 마음이지.”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취업하는 게 쉽지 않지?” 라고 따스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진정으로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목이 탔다. 친구가 내 시계를 의심할 때처럼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밥은 잘 챙겨먹고 있지?” 사소한 염려의 말들이 내 귀를 아프게 때려댔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내 안에 불편이 커질 것 같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얼마나?”

“한, 20만원 정도만 보내주시면 돼요. 아직 과외비가 안 들어와서요...”


어머니는 더 묻지 않고 알겠다고 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 뜨겁다. 그리고 내 귓바퀴도 뺨도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이튿날 통장에는 40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보냈느냐고 문자를 보내니 평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가 너무 돈에 치여 살면 안 된다.」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었나, 하고 돌이켜 봐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허영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말하자면 소탈한 쪽이었고 고등학생 때까지 브랜드라는 것엔 관심조차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그다지 옷이나 물건에 대한 욕심 같은 게 없었다. 남들이 종종 옷을 못 입는다고 타박해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친구 녀석 중 한명이 내게 패션 잡지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에스콰이어, GQ 같은 남성 잡지들이었는데 그 잡지를 보고서도 나는 그저 “내가 사기엔 너무 비싼 물건들이야.”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이런 인간이 되고 말았다. 스물아홉의 취업 준비생. 정작 취업에는 관심도 없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나 하는 한심한 인생.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병적으로 모으게 되는 레플리카와 명품에 대한 환상, 거짓과 허영으로 범벅된 이 삶에도 어떤 이유는 있겠지. 그러나 나는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초침이 움직이며 기판 아래 팔이라고 적힌 숫자가 보였다. 팔일이면 토요일. 일곱 시에 독서 모임이 있으니 이제는 슬슬 준비해야겠지. 나는 손수건으로 시계 글래스를 한번 닦았다. 그 사이 초침은 묵묵히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옷장을 열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으니 셔츠에 가디건을 매치해도 괜찮을 성 싶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논 아이런 화이트 셔츠를 입고 그 아래로는 돌체 앤 가바나의 청바지를 입었다. 셔츠 위로는 회색의 타미 힐 피거 가디건을 레이어드 했다. 어차피 오메가 시계를 찰 테니, 모두 명품으로 도배를 할 필요는 없었다.


모임에 가기까지 약 30분의 시간이 남아 잠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다지 튀지 않으면서 적당히 눈에 띌 정도다. 독서 모임에 나가는데 굳이 패션에 신경을 쓸 이유는 없지만, 최근 잘 되는 여자가 있어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째깍째깍, 초침이 흐르고 30분을 허비하고 났을 때, 나는 구찌 에나멜 스니커즈를 신고 방을 나섰다. 이제 닫히려는 내 문 뒤로 어제 먹다 남은 한솥 도시락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위로 몇몇의 초파리들이 필사적인 날갯짓을 하고, 그 꼴이 보기 싫어 나는 문을 밀었다.


“오늘 옷 되게 잘 어울리시네요?”


모임에 가자 그녀가 먼저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았는지 그녀는 혼자 책을 펼친 채 나를 응시했다.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그쪽도 잘 어울린다고 대답해줬다. 썸?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따로 커피 한잔을 한 걸 가지고 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일반인 이상의 호감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녀는 버튼이 없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 스트레이트 스커트를 입었다. 왼 손목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얇은 사슬 모양의 팔찌를 차고 있다. 신발은 와인 컬러의 메리제인 펌프스.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주는 옷차림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항상 그런 차림이었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깨끗하게 떨어지는 옷들. 우리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서로 한담을 나눴다. 지난주에는 뭘 했는가 같은 가벼운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물었다.


“그런데 무슨 책 읽고 계셨던 거예요?”

“아...이거요?”


그녀는 책을 되접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조르쥬 페렉의 ‘사물들’ 이었다. 소설을 좋아해 대충 어떤 소설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모르고 말했다가 내 무지가 들킬 것 같아 나는 말을 참았다.


“재미있어요?”

“글쎄요. 그냥, 읽을 만해요.”


살짝, 서로의 눈웃음이 오갔다. 이윽고 스터디를 맡고 있는 형이 뒤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럿이 함께 왔는지 다른 스터디 원들도 보였다. 우리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그들과 함께 스터디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스터디에는 새로 오실 분 있는데, 내가 말 했던가?” 


자리에 앉자마자 형이 말했다.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은 자기가 말 하지 않았다면, 미안하다며 곧 올 거라고 말했다. 한 오 분? 그 정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저 멀리서 회색 정장을 입은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깨끗하게 핏이 떨어지는 정장에 밤색의 옥스포드 구두. 옷을 잘 입었다기 보단, 기품이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구두와 정장, 그리고 토드 백만 가지고 저런 느낌을 낸다는 건 각각의 아이템이 모두 고가라는 의미였다. 그는 우리 쪽으로 와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가벼이 인사를 건네고, 서로 소개를 하고 모임은 시작되었다. 순간 묘한 조급함이 나를 휘감았다. 그를 의식해서였을까? 나는 평소와는 달리 좀 더 큰 목소리로, 내 의견을 내세웠다.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개 마냥 짖어댔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는, 적어도 책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허영심이 아닌 진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부분만큼은 내가 남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진짜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모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언제나 나였다. 아니, 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로 평범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저 내 이야기 중간 중간에, 자신의 의문을 섞어 물었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것이었다. 불편한 두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책에 대한, 아니 나의 알량한 자존심에 대한 발언이 모두 끝나고 모임은 마무리 됐다. 스터디를 이끄는 형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너, 왜 이렇게 열심이야?”

“아...형, 그냥요. 저도 모르게....”


형은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터디 원들을 향해 다 같이 뒤풀이라도 가자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오늘 온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를 향해 시선을 뒀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넥타이를 고쳐 메고는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정중히 말했다. 


“혹시 오늘 더 못 가시는 분?”


형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가 살짝 눈빛이 교차하다가, 그녀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그녀는 회색의 정장을 입은 남자와 함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어둔 조명 사이로 그녀의 등이 보였다. 어쩐지 들썩 거리는 그녀의 어깨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뒤풀이에 가서도 나는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를 좋아했던가? 라고 스스로 물어봐도,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방금까지도 내 앞에서 어른거리던 무언가가 사라졌을 때의 박탈감 같은 것. 아니, 위기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오늘 모임에서도 떠들었던 것도 지금 이 뒤풀이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건 모두 그 때문일까. 술을 많이 마신 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뒤풀이 때 없어서 허전했다는 이야기였다. 답장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왔다. 다음엔 꼭 오겠다라는 말과 늦었으니 잘 자라는 대답이었다.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침대에 던진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가문 눈 위로 몇 마리의 초파리들이 어둠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고 되지도 않을 회사에 지원 서류를 넣고 있었다. 계절은 11월이 되어 이제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기업의 공채는 거의 다 끝나고 몇몇 중소기업의 공채와 상시 채용만이 있을 시기였다. 그녀는 2주 전에 스터디를 그만 뒀다. 반면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매주 스터디에 열심히 나오고 있었다. 나올 때 마다 옷이 달라졌지만, 그는 언제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왔다. 때때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저런 고가의 옷들을 매번 입고 오는지. 도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부자인지. 그리고 어째서 자가용이 아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이 정도의 옷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면 차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건데. 의문스러운 건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시계가 없었다. 언젠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시계는 안 차세요?” 라고 묻자, 그는 시계에는 관심이 없어 손조차 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브리오니 정장을 입고 크로켓 앤 존스의 구두를 신는 사람이라면 시계에 관심이 없어도 되겠지. 그런 아이템 없이도 충분히 멋을 낼 수 있으니까. 살리에리와 같은 열등감으로 나는 그를 지켜봤다. 그리고 한 주가 더 지난 어느 날, 그는 수트가 아닌 차림으로 스터디에 참여했다.


“오늘은 평소랑 다르게 입으셨네요?”


나보다도 다른 여자 스터디원이 먼저 그렇게 물었다. 그는 “네, 오늘은 일부러 편하게 입었어요.” 하고 말하고는 언제나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소보다 더 편안해 보여서일까, 여자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소탈하다 라며 칭찬했다. 그동안 한 번도 술자리에 가지 않던 그는, 그 날 처음으로 함께 뒤풀이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참가에 반색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평소부터 궁금한 게 많았던 걸까. 술잔을 다 채우기도 전에 여자들이 그에게 하는 일을,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취미는 뭔지 같은 것들을 물었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러나 묘한 호기심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지금 증권사에 다니고 있으며,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이제 은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별달리 하는 것은 없고 독서가 취미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랄프로렌 자켓이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하며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편히 음식을 먹었다. 바지에 음식이 흘러도 그저 가볍게 웃으며 휴지로 쓱쓱 닦아낼 뿐이었다. 문득 내 오메가 시계가, 적금을 깨서 산 그 시계가 초라해보였다. 물건에 묶여 음식 하나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는 내가, 상대에 대해 질투심이나 느끼는 내가,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한 내가, 부모의 돈을 좀 먹는 내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는 나 자신이.

초라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래 없이 쓴 술자리였다. 2차가 끝났을 때, 이미 시간은 1시가 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향해갔고 인사불성이 된 그와 내가 같은 방향이라 같은 택시를 탔다. 술이 약한 사람인지 생각보다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에게 몇 번이나 집이 어디쯤이냐 물었다. 인사불성이 된 그는 횡설수설했다. 어렵게 그의 집 가까운 곳에 도착해 내렸다. 원래라면 그를 내려주고 그냥 갈 생각이었으나,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상태가 아니었다. 그를 부축하며 집을 묻자 그는 저쪽 높은 지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척 봐도 좋은 동네가 아니었다. 공장이 밀집한 지역인데다 그 중에서도 더 가파른 지형이었다. 이런 곳에 좋은 집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가까운 곳은 죄다 공장들뿐이었다. 


“집이 이쪽 맞아요?”


다시금 내가 물었지만, 그는 앞뒤 구분을 못한 채 그저 나아가기만 했다. 그리고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금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내 손을 뿌리친 채 그는 어느 녹슨 대문 앞에 기대앉았다.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그는 오래토록 전화기를 든 채,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답답한 얼굴로 내가 그를 보자 그가 나를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그만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그 자리를 뜨려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성 싶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전화기에서 어떤 음성이 흘러나왔다. 짜증이 가득 담긴 그 목소리는, 어쩌면 내가 아는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어느새 짜증은 경멸로 뒤바뀌고, 수화기 너머에 내가 알았던 누군가는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되어 뚝-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분노한 전화는 계속 이어졌고 기나긴 송신음도 이어졌다. 끝내 전화를 다시 받지 않자 그는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던지고 자신의 신발까지 벗어 던졌다. 비탈길 아래로 떨어진 한 켤레의 로퍼가 내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씩씩 거리더니 방금까지 기대고 있던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고 낡은, 마치 개집만큼이나 초라한 집으로 그는 맨발로 기어 들어갔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앞에 떨어진 구두를 주웠다. 안쪽에 크로켓 앤 존스, 라는 상표와 함께 260mm라는 음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신발을 집었던 나는 내 발 사이즈가 260mm라는 걸 기억해냈다. 하늘을 봤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 아래, 나의 부정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훔친 로퍼를 신고 집까지 걸어왔다. 내가 신었던 레플리카 운동화는 오는 길에 진작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 앞으로 오자, 작은 택배 상자 하나가 있었다. 403호라고 적힌 택배 박스 위에는 내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상자를 들고 지친 몸을 방으로 들였다. 훔친 구두를 조심스레 신발장에 넣고 나는 택배를 뜯어봤다. 여동생이 보낸 구두였다. 작은 메시지가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오빠, 이번에 졸업 전에 실습 나갔다고 말했지? 적지만 첫 월급 받아서 오빠 선물 뭐 할까하다가 이거 골랐어. 구두는 잘 모르지만, 에스콰이어 구두가 좋다고 엄마가 말하셔서. 비싼 건 아니지만 오빠 면접 볼 때 신고가면 좋겠어.」  


고 3인 여동생이, 실업계를 다니는 내 동생이 내게 보낸 구두였다. 이제 그 애는 자기 밥벌이를 해, 처음으로 내게...이 못난 오빠에게 면접을 가라고 구두를 사 보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째선지 눈물이 났다. 복받쳐서, 미안해서, 고마워서, 마음이 아파서, 내가 싫어서 눈물이...눈물이 났다. 새벽 세시에 나는 남들이 들을 만큼 크게,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 울었다. 울고 싶어서가 아니라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훔친 크로캣 앤 존스 구두가 있는 그 방에서, 몇몇의 초파리들이 아직도 성실한 날갯짓을 하는 그 어둔 방안에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울었을까. 눈을 떠 내 오메가 시계를 바라봤다. 초침은 어느새 몇 십 바퀴는 돌아 분침으로, 분침은 한 바퀴를 다 돌아 이제 시침은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우는 동안 자기혐오에 치를 떨 동안 시계는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진품인 그 시계는 말없이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그 누구도 속이지 않은 채, 느리지만 한 걸음걸음 걷고 있었다. 아아, 삶이란 어쩌면...어쩌면....내 삶이 레플리카는 아니었을까? 퉁퉁 불어터진 눈으로, 마른 목으로 나는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상하기 시작한 시큼한 도시락 냄새가 내 콧속으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내 삶으로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이튿날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제 실수한 건 없었나요? 제가 술이 좀 약해서...」 스스로 실수를 했다는 걸 아는 것일까. 오후가 다 되어 일어난 나는 그에게 별 일이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곧 답장이 왔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그런데 제 신발이 없어졌는데, 의심하는 건 아니고 혹시 본 적 없으세요?」 어제 일을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순간 모르는 척 하려고 하다가 나는 「크로켓 앤 존스 구두 말하시죠?」 라고 답장을 보냈다. 곧 전화가 왔다. “혹시 가지고 계세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제 너무 취한 상태에서 신발을 던지기에 내가 일부러 챙겨 뒀다고 말이다. 그는 안도한 목소리로 “다행이네요. 그거 비싼 거라서...” 라고 말하다가 말을 삼켰다. “아, 네 그렇군요.” 라고 내가 시큰둥이 대답하자 오늘 좀 받을 수 있느냐고 그가 물었다. 나는 몇 시가 좋겠느냐 했고 그는.


“지금이 한 시니까, 세시 정도면 좋지 않을까요?”


문득 머릿속에, 오늘은 평일이고 오후 세시는 근무 시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하려고 할 뻔하다가 참았다. 그리고 “세시는 무리고 다섯 시에 볼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일이 있어서요.” 라고 둘러댔다. 우리는 다섯 시에 교대 쪽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일찌감치 나갈 준비를 하고 그의 구두를 챙겼다. 크로켓 앤 존스 매장이라면 신세계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 옷을 신경 써 입고 가방에 구두를 챙겨 넣었다. 신발은 일부러 편안한 팔라디움 워커를 신었다. 적당히 꾸미고 백화점에 가, 크로캣 앤 존스 매장에 들어섰다. 무슨 일로 왔냐기에 나는 지인의 구두인데 슈케어를 좀 받고 싶다고 말했다. 매니저가 구두를 보자기에 나는 그 앞에 구두를 꺼냈다. 매니저는 꼼꼼히 구두를 살피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손님, 이 구두는 저희 매장께 아닙니다.”

“그럼 병행 수입품이나, 수입으로 직접 구매한 물건이란 말인가요?”


내 말에 매니저는 살짝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죄송하다는 겸양의 말을 몇 번이나 하고서 말을 이었다.


“진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퍼의 형태나 그 외 부분들을 봐도...상당히 잘 만들어진 레플리카 제품으로 보입니다만...”


조심스러운 그의 말에, 언젠가의 내 친구와 같은 경멸이 깔려 있었다.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그렇냐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매니저는 확실하다며 슈케어를 거부했다. 백화점을 나왔을 땐 세시였다. 교대로 가는 내 걸음이 무거웠다. 착잡한 기분이었다. 산다는 건 뭔지, 사람이라는 건 뭔지. 도대체 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거짓만을, 레플리카로 범벅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교대에 도착해서도 씁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장기가 돌아 나는 오뎅을 파는 집에 가, 오뎅 몇 개를 집어 먹었다. 문득 그 삶이 오뎅을 끓이고 있는 그 500원짜리의 생이 진실 되게 느껴졌다. 내 입안으로 퍼지는 어묵이, 이것만큼은 레플리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묵을 4개나 집어 먹고서는 2,000원을 내고 아주머니에게 참 맛있었다고 인사했다. 아주머니는 삶에 찌들었으나 따뜻한 미소로, 진실 된 목소리로 고맙다고 답했다. 더디지만 시간은 갔고 5시가 되어 나는 그를 만났다. 크로켓 앤 존스 구두를 그에게 건네며 좋은 신발이니 소중히 다루라고 말했다. 그는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옷차림과는 다른, 마치 어제 헤어졌을 때와 같은 옷차림의 그를 보며 나는 말했다.


“요 앞 오뎅이 맛있던데, 같이 먹고 갈래요?”


그러나 그는 약속이 있어 갈 수 없다고, 다음에 꼭 자기가 밥을 대접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의 그 여유로운 미소로, 그러나 가식적인 그 얼굴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흐려져가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신에게도 삶은 지옥이겠지...” 


어느새 그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이 되어, 뭇 사람들의 품으로,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는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날 이후 그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다. 모임을 나갔던 그녀가 다시 내게 연락이 왔던 것이다. 그에게 구두를 건네준 지 3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요즘 뭐하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우리의 메시지는 결국 전화로 이어졌다. 그녀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러는가가 궁금해 나는 만나자고 말했다. 그녀를 만나는 그 날, 나는 거울 앞에서 한 시간은 보냈다. 내가 입을 수 있는 가장 깨끗한 룩을 보여주고 싶었다. 옷장에 있는 옷을 죄다 꺼내 입어보고 나자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약속 장소는 고급 카페였다. 핸드 드립 메뉴만 있는, 한 잔에 12,000원이나 하는 커피를 파는 카페. 돈이 아까웠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 그녀는 이번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저번보다 한층 더 꾸민 느낌이었다. 남색의 랩 원피스에 스와로브스키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신발은 진회색의 스틸레토 구두였다. 절제 됐지만 충분히 꾸민 티가 났다. 나는 그녀를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하고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책 읽으세요?”


그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책을 되접어 내게 표지를 보여줬다. 이번에도 페렉의 책이었다. ‘잠자는 남자’ 나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외국 소설을 좋아하느냐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래서 페렉의 소설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번에도 페렉 소설 읽고 있던데?” 하고 말했다. 


“네, *영미 작가들 책 좋아해서요.”

“아...네....”


나는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힘없이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10,000원이 넘는, 내 시급의 두 배에 육박하는 커피 두 잔을 시켰다. 화려한 핸드 드립이 펼쳐지고 결국 내 앞에는 평범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 고급스런 잔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이지 중요하지 않은,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 이야기에 한 중간에 나는 물었다. 나는 당신이 그 회색 정장을 입은 이와 잘 되고 있는 줄 알았다고, 그냥 그런 느낌이라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서일까. 그녀는 잠시 당황한 티를 내다가 “사실은...” 이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 사람이 먼저 연락이 왔었어요. 만나자고”

“음...그랬구나.”

“네, 안 만나려고 했는데 계속 만나자고 해서, 몇 번 만나줬거든요.”


그녀의 그 어떤 말에도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그에 대해서 모두 말했다. 그가 입고 왔던 옷들이 모두 남의 옷이라는 걸. 신발은 모두 레플리카라는 걸. 사실 증권사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세탁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까지. 왜 이런 걸 내게 말하는가 싶어 그녀를 봤다. 그녀는 그런 내 의중을 알았던 걸까.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는 내게 말했다.


“그냥, 그 사람이랑 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제가 오해했나 보네요...”

“네...제 스타일도 아니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딱 질색이거든요.” 


한숨이 나왔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아무 말이나 해댔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을, 문학에 대해 철학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녀는 웃음으로 내 말을 경청하고, 내 지성에 감탄했다는 듯 나를 칭찬했다. 우리가 헤어질 즈음 그녀는 다음에 또 시간되면 보자는 말을 내게 남겼다. 나는 슬피 웃으며 그녀를 봤다. 내 슬픈 미소를 그녀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선물 하나 줄까요?”

“선물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화사한,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는 내 오메가 시계를 손목에서 풀었다. 은색 메탈 시계가 가벼이 내 손을 떠났다. 나는 그 시계를 그녀의 오른 손 위에 쥐어주며 말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진짜는 이것 하나 밖에 없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거리로 나왔다. 저 뒤에서 나를 향한 의뭉스런 눈길을 무시하며 나는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는 숲을 향해 지워져갔다. 시계를 푼 내 손목이 가벼워  걸음이 빨라졌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나는 뜨거운 물에 온 몸을 씻어냈다. 시계를 찼던 왼 손목에 시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태리타월로 그 부분을 박박 문지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여태 관리하지 않던 메일함을 확인했다. 고지서와 게임 영수증, 그리고 그 사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메일 하나가 섞여 있었다. 메일에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중소기업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면접일은 언제이니 이때까지 지정 장소로 와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모니터를 보다가 내 옷장을 열었다. 언젠가 사두었던 캐릭터 정장을, 그 230,000원 짜리 정장을 꺼내 입었다.  STCO의 화이트 셔츠를 입고 동생이 사 준 에스콰이어 구두를 신었다. 구두는 내 발에 딱 맞았으나, 아직 길이 들지 않아 낯선 감촉이었다. 나는 언제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던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어색한 손길로 넥타이를 오리엔트 매듭으로 매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 키고 오래 전 면접을 위해 준비한 멘트를 소리 내어 말하려했다. 그러나 문득, 지금이 몇 시인가 싶어 손목을 봤다. 허옇게 뜬 손목에는 시계가 있었던 자국만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벽장에 걸린 시계를 봤다.


11시 59분. 아직, 오늘이었다. 


*조루쥬 페렉은 실험적인 글을 쓴 프랑스 작가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썰쓰데이 아일랜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