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뒤주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홉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바는 한산했다. 매너저는 잔을 닦고 있었고 나는 무스카토 다스티를 한 병 꺼내왔다.
“네가 살 거야?”
웃으며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달콤한 와인을 들이켰다. 간단히 먹을 안주가 없어, 손님에게 내는 과자를 꺼냈다. 딱히 마리아주가 필요한 와인도 아니었다. 한 모금, 한 모금. 바의 음악과 함께 탄산이 울대 아래로 싸하게 흘러내려갔다.
“너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말이 없었냐?”
매니저가 물었다. 나는 실어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조용히 머리를 까딱했다. 정작 그리 말하고도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하는 당신의 진심이 보였으므로.
“신기해. 이렇게 말이 없는데도 여자들이 널 찾는 걸 보면 말야.”
쓰게 웃었다. 내 위장 속에 탄산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오늘만큼은 내 안에 모든 이야기를 다 토해내고 싶었다. 나는 매니저를 봤다. 그러나 이내 체념했다. 이해하려 들지 않을 사람이다.
“형 사도세자 알아요?”
“알지, 뒤주에 갇혀 죽은 놈이잖아.”
목이 뜨겁다.
“사도 세자는 뒤주에 갇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매니저는 한참을 생각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나는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올라오는 기포를 관찰했다.
“설마 날 죽이기야하겠어?”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지만 설마 나를 여기에 넣어 죽이기야 하겠어? 뭐 그런 생각을 했겠지. 그런 걸 보면 영조도 미친놈이야. 죽여도 지 자식을 그렇게 죽이는 놈은 없을 테니까. 어떤 면에선 창의적인 건지도 모르겠네.”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음악이 바뀌었다. 매니저는 내 눈을 보더니 퀸의 ‘Love of my Life’라고 말했다. 아직도 이런 걸 모르면 어쩌냐는 책망기가 담긴 말투였다. 나는 말을 돌렸다.
“영조는 정말 아들을 죽일 생각이었을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 근데, 어릴 때 국사 선생님이 그러더라. 뒤주 속에 풀을 썰어 넣었다고. 그런 걸 보면 살릴 마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삼키고 나는 물었다.
“그럼 형, 사도세자가 살아서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며, 그는 말을 딱 잘랐다. 나는 궁금해서 그러니 말해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매니저는 남은 와인을 잔 째 다 마시고는 명료하게 말했다.
“죽여야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부터.”
잔에 담긴 술을 다 마셨다. 입안이 텁텁해 화장실에 가 입을 헹궜다. 돌아오자 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착석했다. 나를 보며 살짝 웃기에 고개를 까닥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블루넌 아이스바인. 바에서 팔리는 와인은 대체로 아이스 와인이거나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소수의 여자들을 대상으로만 하는 곳이라 드라이한 와인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매니저가 아이스 버킷에 술을 내오는 동안 나는 여자의 행색을 훑었다. 에르메스 팔찌에 도나카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다. 향수는 메리 미. 시계는 불가리다. 나도 한잔 마시겠냔 물음에 조용히 잔을 꺼냈다. 그리고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서로를 떠보는 농담들이 잔으로 섞여 들었다. 우리의 의미 없는 이야기는 결국 섹스의 가능성을 엿보는 눈빛으로 가닿았다.
스물에 집을 뛰쳐나온 나는 왜 여자들이 내게 섹스를 기대하는 건지, 나의 무엇이 그녀들로 하여금 소유를 꿈꾸게 하는지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스물다섯이 넘고서는 더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그녀들을 이용해 살아남느냐에 대한 것뿐이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웃었다. 너무나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정면으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출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어떻게 자기 생각을 읽느냐고 묻는 그녀 앞에 타로 카드를 꺼냈다. 3년 전부터 쓰고 있는 모건 그리어 덱이다. 나는 카드를 주욱 나열하고 그녀에게 세장을 뽑아보라고 말했다. Judgement, Death, The Chariot. 나는 카드와 관계없는 키워드들을 말하며 그녀의 생각과 성향을 말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빛을 빨아들이는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거짓말이죠.....?”
갈색 눈이 나를 훑는다. 어떻게 이토록 잘 맞추느냐는 힐난이 담긴 눈길이다. 신기함보다도 소름이 돋은 그 눈길에는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헛된 욕구가 움실거렸다.
“잘 봐요. 사람도 카드도.”
“어떻게요?”
“내가 관심 있는 거라면 뭐든 유심히 보는 편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한층 더 혼탁해진 우리의 눈길 아래로 향수에 감춰진 체취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없었다. 스탠드 아래에는 작은 포스트 잇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전화번호 같았다. 나는 호텔의 창을 열었다. 이제 막 봄에 걸쳐진 하늘이 부끄러울 만큼 푸르렀다. 열린 창 아래로, 이제 막 출근을 시작하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시끄러운 차 위로 포스트잇을 구겨 던졌다.
나는 비어있다.
완전히 비어있다.
거리로 나가 어딘가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들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목을 움츠렸다. 이른 햇살이 내 뒤통수 위에 얹히고 나는 종종 걸음으로 엄마가 있는 병원을 향해 걸었다. 공허한 마음속에 작은 설렘이 일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신호가 간 후에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잘 됐어?”
“네.”
간단히 대답하자 그는 다행이라고 말하고는 당부했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해. 그래야 돈을 쓰지.”
전화를 끊고서 계속 걸었다. 버스를 타도 됐지만 나는 다섯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했지만 나는 병실로 가지 않았다. 대신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다. 커피에서는 싸구려 원두 맛이 났다. 케냐 AA에 뭔가를 섞긴 했는데 블랜딩도 추출도 엉망이었다. 맛없는 커피를 테이블에 올리고 필슨256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이제 막 개봉을 하는 영화의 원작 소설이었다. 이런 걸 읽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화의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선 읽어야 했다.
나는 책을 펼친 채 카운터 쪽 테이블을 봤다. 여자는 오지 않았다. 차분히 책을 읽으며 문을 열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주시했다. 삼십 분쯤 지나자 여자가 들어왔다. 어제와 달리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채였다. 속이 비치는 에이프릴 원피스 안에 흰색 캐미솔을 받쳐 입었다. 오른쪽으로 약간 비틀어진 입매가 어제와 여전하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곧바로 카운터로 향한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 한 접시. 무슬림과도 같은 그녀만의 의식.
카운터에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깨에서부터 내려오는 곡선이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 같다. 골반에서 퍼지는 선이 아래, 아래로 내려와 움푹 들어간 발목에서 끝이 난다. 힐을 신지 않았음에도 다리가 길다. 굽이 5cm남짓한 검은색 메리제인 펌프스....그 안에 있을 그녀의 발모양이 문득 궁금해진다. 구두를 벗겨보고 싶다.
그녀가 돌아서고 나는 식은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 보는 척하며 다시 책에 고개를 돌렸다. 내 뒤통수로 그녀의 정갈한 구두 소리가 다가온다. 내 마음은 다시 부풀어 오르고 그녀가 나를 스치는 순간 이름 모를 향수 냄새가 덧없이 흩어졌다.
엄마의 병실로 올라간 건 해가 진 이후였다. 희던 달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보름이다. 나는 특실로 들어가 나를 낳아준 여자 옆에 섰다. 달처럼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몇 번 훑었다. 나는 스툴을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앙상한 손마디를 잡았다. 이미 몇 달 전에 죽었어야 할 손이 버석버석 바스라 질 듯 손에 감겼다. 어둔 눈이 초점을 찾고 나를 바라봤다. 뒤창으로 들어오는 보름달이 희미하게 그녀의 동공에 걸려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차가운 분노가 내 안에서 치솟고 엄마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쌔액쌔액 쉬어지는 가쁜 숨소리가 지루히 병원을 울렸다.
“엄마.”
건조한 목소리를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요의가 가득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는 보름달이 뜨면 배설할 수 없었다. 죽을 만큼 요의가 차 방광이 터질 것 같아도 나는 그 무엇도 내보낼 수 없었다. 나는 야윈 엄마를 봤다. 다 지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다 지난 일이라고....당신이 나를 뒤주에 가둬 죽이려고 했던 그 끔찍한 일을 그만 잊으라고 또 다시 나를 달랬다.
에르메스 팔찌를 찬 여자는 또 다시 블루넌 아이스바인을 주문했다. 우리는 손님을 더 받지 않고 조용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허영심을 적당히 긁어주다 보니, 한 병 두병 쌓이다 결국 샤토 라투르를 뜯었다. 1997년 빈티지였다. 우리는 매입했던 가격보다 세배나 더 비싼 가격으로 술을 팔았다. 미각을 상실한 채 그 비싼 와인을 다 마셨다. 그녀가 카드를 긁고 나는 호텔까지 그녀를 바래다줬다. 그런 식이었다.
이 여자가 끝나면 또 다른 여자로. 더 이상 받아낼 게 없을 때까지 만나는 그런 삶이, 내 관계의 전부였다. 회충과도 같은 삶을 10여년째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이 가치가 있을까, 과연 나는 살아있는 것일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아직 내 옆에 있었다. 나는 벌거벗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볼에 키스했다. 눈가에 작은 주름이 지고 그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귀를 살짝 핥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그녀의 귓구멍 속에 배설했다.
호텔을 나와 카페에 왔을 때, 내 옷깃에는 그녀의 향기와 술 냄새가 남아있었다. 마치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나는 또 다시 병원 1층의 카페로 향했다. 테이블 저 먼 곳에는 구두를 신은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브라우니를 다 먹을 때까지 관찰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책을 읽고 있다. 매일 아침 여기에 들러, 40페이지 정도를 읽고 어디론가 간다. 내가 모르는 어떤 곳을 향해...내가 살지 않는 세계의 그 어디론가.
그 후, 바로 출근 해 나는 매니저에게 처음으로 고민을 털어놨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데,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모르겠다고. 그는 말없이 냉장고로 가 리제르바 레이트 하비스트 한 병을 꺼내왔다.
“그 여자는 돈이 돼?”
나는 조용히 술을 마셨다. 입술을 달싹이며 내가 말하려 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 둘이 들어왔고 내 말은 다시 의미 없는 대화 속으로 흩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또다시 이름 모를 호텔에서 자고 있었다. 물컹거리는 물체가 내 손에 잡히고, 오직 허무만이 컴컴하게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어둠속을 나는 홀로 유영하고 있었다. 마치 밤 바다에 표류하는 선원이 나무 조각 하나에 의지하듯, 나는 삶이라는 허무를 여자에 기생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여자를 다시 보게 된 건 꼭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였다. 엄마는 쉽게 죽지 않았고 장례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던 어느 아침. 언제나의 그 카페에서 맛없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때, 여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를 지나쳐 카운터로 간 여자는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를 주문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책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녀를 보다가, 그녀가 다시 일어나 나갈 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 뒤까지 따라가 말을 걸었다.
“네?”
내가 왜 말을 걸었는지를 설명하자, 그녀는 쉽게 납득을 못하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설명했으나 여자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돌아섰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구두소리만이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여름이 올 때까지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카페라는 카페는 다 들러봤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바에는 전 만큼 나가지 않았다. 내 다른 전화기에는 수십 통의 전화가 채무처럼 쌓여갔다.
그 봄에서 여름까지, 나는 엄마가 있는 병실에 들러 편지를 썼다. 혹시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면 건네주고 싶어서였다. 많은 편지를 쓰고 지우고 버리고 다시 썼다. 가을이 됐을 때쯤에야, 나는 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수정할 필요가 없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혹 그녀를 마주치면 전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사이 엄마는 착실히 죽어가고 있었다. 숨을 쉬고는 있으나, 늦어도 올해 안에는 죽을 것이었다. 나는 죽어가는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왜 당신은 나를 뒤주에 가뒀을까. 정말 당신은 나를 죽일 작정이었을까. 만약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왜 그 안에 음식을 넣어뒀을까.
물어보기엔 너무 늦었다. 스물 이후, 당신을 처음 본 게 이 병원에서다. 내가 봤을 때 이미 당신은 무너져 있었고, 내가 받아야할 적은 유산만이 내가 당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생각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담배를 태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열시가 좀 넘은 시간, 초승달이 어둡게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부싯돌을 돌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저 멀리 횡단보도를 바라봤다. 멍하니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보았다. 다들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흩어지는 걸까. 그런 의미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여러 번 스치고 이젠 들어가야겠다고 싶을 때 쯤. 눈에 띄는 신발 하나가 보였다.
검은색 메리제인 펌프스였다. 초점 없는 생에, 초점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무엇엔가 이끌린 듯 횡단보도를 향해 걸었다. 이윽고 내가 알던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하던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놀란 듯 일그러졌다. 나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둔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버려도 좋으니 한 번만 읽어봐 달라고 말했다. 여자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는 일그러진 입 꼬리로 말했다.
“소름끼쳐요. 그 쪽...”
그리고는 더는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고는 몸을 돌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 나는 구두소리를 내며 가는 그녀에게 그냥 죽어버리라고 뇌까리고는 돌아섰다. 그 후, 나는 다시 바에 출근했다. 전처럼 일주일에 5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엄마는 아직도 죽지 않고 누워있었다. 이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지루할 것 같았음에도, 그녀는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 일상도 죽어가는 엄마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모르는 여자들과 잠을 잤고 그녀들이 사는 술을 마셨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을 때면 죽어가는 엄마를 보고 돌아와 꿈 없는 잠을 잤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날 이후 구두를 신은 여자와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느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늦은 새벽....퇴근을 하고 엄마가 있는 병원에 들렀다. 언제나처럼 스툴을 가져와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요의가 차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지만 오줌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욕지기를 내뱉고는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맥박이 아까보다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바라봤다.
허망한 눈길로 호흡기를 단 채, 내게 손을 뻗은 늙은 여자가 보였다. 엉겁결에 손을 잡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 손바닥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죽기 전에 일어나는 경련 같은 것일까. 나는 간호원을 불렀고 맥박이 더 불규칙하게 뛰자, 의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울컥울컥 입 안에서 몇 번 물을 토해내더니 엄마는 눈을 뜬 채 그대로 흩어졌다. 심박이 더 뛰지 않자 간호원은 아직 귀가 열려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 주라고 일렀다. 나는 한참이나 엄마를 보다가 가슴 속에 있던 한 마디를 겨우 꺼냈다.
“다 잊을게요.”
엄마가 필사적으로 내 손바닥 위에 쓴 것이 뭔지 깨달은 건 영안실로 갈 때였다. 시체가 냉장고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손안에서 꼬물거렸던 그 움직임이 하나의 문자라는 걸 알았다. 용서. 엄마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용서라는 말을 내 손안에 써 넣었던 것이다. 마음이 헛헛했다.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도 평생 잊지 못했던 것일까.
장례를 치러야했다. 좋건 싫건 나를 키워줬던 여자를 위해 또 다시 채무를 갚아야 할 때였다. 이제 나를 묶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앞으로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받은 유산을 처분해 전세로 아파트를 구해야겠다. 그리고 장례만큼은 생전 그녀가 원했던 대로 해 주어야지. 이튿날 생전 엄마와 친분이 있다던 장의사가 찾아왔다. 그녀의 연락처에 남은 몇 안 되는 지인들 중 하나였다.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장의사는 내게 장례를 위해 할 일과 내가 선택해야할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대부분이 얼마나 돈을 들이겠냐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 장의사는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드님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
뭐라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있자 장의사는 좀 더 내 기색을 살피다가 말했다.
“생전에 어머니가 아드님한테 많이 미안해하셨어. 자기가 크게 잘못한 게 있다고....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그 걱정을 하더라고. 용서를 빌고 싶다고....”
내가 계속 답이 없자 장의사는 나를 보고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 용서해 드렸으면 좋겠어. 어차피 이제는 고인이신데....다 내려놓고 가실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한참이나 답을 않다가 문득 내 손바닥이 간지러워 말했다.
“예...다 용서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장의사는 내게 물었다.
“혹시 관은 어떻게 하시라는 말씀은 있으셨나?”
나는 종이를 꺼내 장의사에게 내밀었다. 생전 어머니가 남긴 유언장이니 이걸 따라서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장의사는 꼼꼼히 보더니 말했다.
“돈이 좀 들겠네. 관은 오동나무로 하고....나무도 제일 좋은 걸로 써 달라고 해 놨구만...관 모양까지 정한 걸 보면 죽을 걸 진작 알았나 봐. 그런데 말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봤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혼자 말했다.
“관 모양이 꼭.....뒤주처럼 생겼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