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주 예쁜 봄날이었다

by 우청아

무언가에 쉴 새 없이 쫓기다 겨우 잠에서 깼다. 온몸은 땀에 절 어 퉁퉁 분 것 같았다. 눈물인지 땀인지, 축축한 옷으로 벅벅 닦아냈다. 여전히 코 끝과 목은 아팠지만 열은 내린 듯했다. 역 시 돈이 좋아.

돈을 벌려면 매일 아침 시체 같은 몸을 끌고 병원에 가야 했다.

비싼 링거를 팔에다 쑤시면 겨우 오후 내를 버틸 수 있었다. 양팔은 주사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들었고, 엉덩이가 출렁일 때마 다 통증으로 움찔거리곤 했다. 이제 열이 내렸으니 링거 없이 도 하루를 버틸 수 있으리라.

카드 어플을 켜서 이번 주에 쓴 병원비 이력을 살폈다.

304,700원.

일해야 하는데 아픈 내가 잘못이다. 입에 맴도는 쓴 맛을 잊고 자 괜히 나를 탓했다.


"청아씨,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요?

직속 상사가 출근하자마자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가 무슨 생 각으로 내게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건강 얘기를 할 때면 꼭 죄인이 된 것 같다. 상사가 말을 걸 때마다 괜히 주눅 들어 쭈뼛거린다.

"네, 이제 다 나았나 봐요."

이제 팔팔하다는 뜻으로 팔을 치켜들어 두드렸다. 상사는 핏기 없는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너무 자주 아파."

그래, 저 말이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아프면 제일 힘든 건 난데.... 아니, 일해야 하는데 아픈 내가 잘못이다. 다시 또 나는 죄인이 된다.

저게 그의 걱정 방식이라고 애써 감내하기엔 내가 그렇게 너그럽지 못했다. 점점 여유가 사라지는 것 같아 또 자책한다. 사람 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데, 그래야 돈도 들어오고, 행복도 굴러오고, 또...

어쨌든 여러 가지로 좋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단점을 먼저 찾아낸다. 앞에서 같이 하하 웃다 가도 뒤돌면 한숨만 쉰다. 주머니에 상황에 맞는 가면을 여럿 챙겨 갈아 끼울 타이밍을 찾는다. 실제 내 표정이 어떤지는, 아 무도 모른다.

사회생활이 피곤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고 항상 그렇겠지만, 요 즘은 어딘가 이상하다. 배터리 15%에서 더 이상 충전되지 않는다. 배터리가 고장 나 전기만 잡아먹는 식충이 같다. 15%로 는 한나절을 버티기 버거워서, 꺼지지 않으려고 중간중간 보조 배터리를 꽂아둔다. 천천히 내려가는 퍼센티지를 보면서 제발

3시간만, 2시간만 버텨 달라며 내 마음에 싹싹 빈다. 하루가 끝나 집에 도착하면 바로 충전기부터 꽂는다. 보조 배터리도 충전한다. 그래야 내일 하루도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오늘도 고생했다. 내일도 고생하자.


그날은 5월 어느 날이었다.

하루하루가 아까울 만큼 눈부시게 맑았다. 햇볕은 부드럽고 바 람은 살랑였다.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할 때면 여린 잎이 어느새 장성해져 성숙함을 풀풀 풍겼다. 풀향기가 짙어질수록 여름을 언뜻언뜻 느끼곤 했다. 이 찰나의 봄이 아까워 하루라도 나가 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식은땀과 눈물로 젖어 눈을 떴다. 여느 때와 다른 게 있다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도 못 쉬겠다는 것이었다. 여 린 댐 문이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아, 이 느낌이 얼마만이더라.

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자 세는 것도 잊어버렸다. 공포만이 나를 휘감아 무섭게 달려들었 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이리저리 자세를 고쳐도 달라지지 않았다.

"살려줘, 누가 제발.."

아무도 없는 작은 원룸방에서 누군가에게 애원했다. 잘못했다 고, 미안하다고. 뭘 잘못했고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지만 계속 빌었다. 빌지 않으면 이 지옥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빌어도 끝나지 않았다. 숨이 꼴딱 넘어가 죽는구나, 체념할 때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살았네.


안도도 잠시, 살면 뭐 하나. 일하러 가야 하는데. 일하려면 에 너지가 필요한데. 그런데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방전이다.


절대 갈 수 없다. 일하러 나갔다가는 또 지옥을 보고 올 게 뻔했 다. 배터리가 0%인 사람은 대체 뭘 할 수 있나? 15%에서 버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방전될 줄은 몰랐다. 어떤 전자기기든 배 터리가 망가지면 새것을 사 갈아주면 된다. 그럼, 내 마음 배터 리는? 새 걸로 갈아줄 수 있나? 고쳐야 하나?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하러 가야지.


나는 화장대 앞에서 울고 부기를 빼고를 반복했다. 겨우 화장하고 머리를 말리다 보면 또 화장이 번져 다시 해야 했다. 평소 보다 서너 배는 더 오래 걸린 것 같았다. 현관을 열자마자 주룩 흐르는 물을 닦지 말자고 다짐했다. 비비면 번지니까, 말리자.

말리고 흐른 자국만 어떻게 하면 되겠지.

얼굴은 붓고, 심장은 벌렁거리고, 숨은 차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일해야지. 그래야 먹고 사니까.

오늘도 고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