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면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비스듬히 비추는 햇빛 아래 앉아 맛있는 커피.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 책을 읽다 사색에 빠지기. 누군가 보채지도, 시간에 쫓기지도 않는 나만의 시간.
계획 없이 무작정 공항에 내려 가장 처음 한 것은 구글맵에 카페 검색이었다. 한 가지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라면 일본에는 한국처럼 카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자니 너무 로망과 멀어지는데… 신경질적으로 구글맵을 껐다 켰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니 걸어서 다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비행기표를 끊고 30분 만에 예약했던 숙소로 향했다.
일본에 와서 해보고 싶던 게 그것밖에 없었나? 생각나는 건 없었다. 정말 카페에서 책만 읽고 싶었다. 날씨는 얄궂게도 우중충하기만 했다. 한국은 따뜻하고 맑았는데 일본은 춥고 비가 왔다. 역시 집 밖에 나오면 고생만 한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다른 거라도 해보기로 했다. 정말 다른 하고 싶은 게 없었던가? 사실 카페에 앉아 책 읽는 건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일본까지 오고 싶었던 걸까? 낯선 땅에, 낯선 사람에, 낯선 문화에, 모든 게 편치 않은 곳까지 와서 난 무얼 하고 싶었나.
숙소 근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허기를 때웠다. 근처에 줄 서는 맛집이 있었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저 맛이 궁금해서 저리 비를 맞으면서 서있는 게지. 신기하다.
4조 정도 되는 다다미방에 이불을 깔고 벌렁 드러누웠다. 두어 시간 같은 자세로 숏츠만 보다 잠들었다. 나 정말 도쿄 왜 왔지.
심장이 쿵쾅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5시 4분. 전날 11시쯤 잠들었으니 생각보다 일렀지만 일어날만한 시간이었다. 숨을 천천히 쉬며 약을 들이켰다. 깨워준 건 고마운데, 나 일어났으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주라. 그렇게 쾅쾅대지 않아도 다 들리니까.
다다미방 옆으로 뚫린 복도 의자에 앉아 마당을 구경했다. 여전히 밖에는 비가 왔다. 빗방울이 풀숲에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 심장 소리. 세상에 나만 있는 느낌. 그래, 이런 걸 느끼고 싶었다. 세상에 내가 신경 써야 할 것 하나 없고 책임감이네 의무감이네 무슨 감 따위 다 필요 없는 곳.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곳. 그럼 그가 기분 좋아서 열쇠를 휙 던져주지 않을까. 기분은 좋은 것처럼 보였지만 열쇠는 꽉 쥔 채 놔주지 않았다. 하나도 쉽게 흘러가는 게 없다. 비행기표가 모든 걸 좋게 해주는 마법이길 바랐는데.
퇴사 후 해외에 가서 생각이 바뀌고, 한국에 돌아와 멋진 인생을 사는, 그런 기행문을 보고 막연한 환상만 있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면 내게도 멋진 마법이 걸리겠지. 공포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곁에 다가와 말했다.
“마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알아. 너도 가짜이길 바랐어. 네가 현실이라면 멋진 마법에 걸리길 바랐고, 네가 환상이라면 마법에서 풀리길 바랐지. 결국 비행기표는 환상이었고 너는 현실이었네.
방으로 돌아가 비상시 약을 꺼내 입에 털었다.
당분간은 그가 따라오든지 신경 쓰지 않고 가벼운 느낌을 즐기기로 했다. 괴롭히려면 괴롭혀보라지. 나한테는 무적의 비상시 약이 있다. 의사 선생님이 내게 딱 맞는 적정량으로 잘 처방해 주셨다 이 말이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네가 일에 묶인 책임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지. 네 진심을 알았더라면 진작 말을 걸어 봤을 텐데.
변명을 하자면 나는 아팠고 지쳐 있었다. 나를 돌보는 것조차 버거워 일단은 훌훌 버리는 것부터 해야 했다. 짐을 매단 채 한 걸음도 걸을 자신이 없었다.
짐이 망가지든 말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바람이 조금 더 세지면 정말 날아가겠다. 한참 너털거렸다.
며칠간 쌓인 거래처 안부 문자를 꺼내 봤다. 갑작스레 그만두게 되어 유감이라는 답장 썼다 지웠다. 또 비상시 약을 하나 털었다. 이것 까지는 아직 아닌가 보다. 천천히 가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근처 문구점에 가 작은 일기장을 샀다. 하루에 3줄만 쓸 수 있는 작은 일기장이었다. 이 일기장에는 고민 않고 생각나는 대로만 적으리라. 줄줄이 적고 나니 비문 가득한 문장에 얼굴이 화끈했다. 이 일기장에는 자물쇠라도 달아야 한다. 혹여 누군가 본다면 비웃을 게다.
다음장을 펼쳐 문장을 가다듬어 다시 적기 시작했다. 다 정리하고 나면 되다 만 문장을 북북 찢어버릴 테다. 찢어진 문장은 다시 마음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겠지. 숨어라. 그 자리에 큰 상자를 만들어 단단히 잠가버릴 거니까. 일기를 다시 적다 꾹꾹 눌러쓴 펜자국이 보였다. 되다 만 문장도 결국 내 진심인데.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버렸었구나.
지금까지 달았던 마음속 자물쇠가 몇 개였더라?
그리고 그 열쇠들은 어디 있지?
열쇠 보관함이 따로 있던가?
내 마음을 누가 들여다본다고. 본다고 해봤자 나 아닌가.
나에게 조차도 숨기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잃어버린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너희가 없어 내 마음이 이리 허전한가 봐.
되찾을 수 있을까?
풀어야 할 게 산더미다.
모든 걸 쉽게 풀어주는 마법이 있었다면 이리 고생하지는 않았겠지. 세상에 마법은 없다. 마법처럼 보이는 노력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