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수국, 점원, 하늘

by 우청아

이튿날은 날이 갰다. 어제 비가 온 줄도 모르게 뜨거운 열기에 길바닥이 바짝 말랐다. 선선하지만 포근한 바람이 불었다. 반팔을 입어도 되겠다. 침대 밑 수납함에서 급히 꺼내 온 반팔티를 탈탈 털었다. 올여름의 내가 이렇게 급히 해외에 올 줄 알았다면 작년에 잘 정리해 두는 건데. 압축팩 속에서 한껏 구겨져 겨울잠을 잤던 티셔츠는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했다. 숙소에 다리미가 있던가. 그럴 리가. 티셔츠에 물을 살짝 묻혀 탈탈 털었다. 달라진 건 없었지만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다는 만족감이 생겼다. 사실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곳은 아주 낯선 곳이니까.


전 직장은 모두의 옷에 참 관심이 많았다. 내가 무슨 요일에 무엇을 입었는지, 구겨졌는지, 얼룩이 졌는지. 이건 잘 어울리네, 별로네. 편하고 깔끔하게만 입으면 된다던 생각이 점차 까다로워졌다. 언제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세상에서 가장 관대하고 자비로운 직장. 그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며 회의 때마다 얘기했지만, 고마움을 모르겠어 결국 퇴사했다. 후회는 없었다. 일부러 머리를 부스스 말리고 구겨진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모습이 어딘가에 비칠 때마다 직장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곳은 일본이니까. 난 이제 더 이상 그곳 소속이 아니다.


오늘 할 일, 없음. 날씨가 좋아 근질거려 나오긴 했지만 뭘 하는 게 좋을지 몰랐다. 쇼핑? 맛집? 카페? 치바현의 작은 마을에 그런 걸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다. 주로 시간이 나면 자기 계발서를 읽었지만 여행까지 와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방 속에 꼭 챙기고 다니는 e북 리더기를 만지작 거렸다. 당분간 휴가야. 자기 계발에 좀 지쳐서.

구글맵을 켜 한참을 뒤졌다. 광대가 뜨끈해 손으로 부채질했다. 구글맵 이거 진짜 도움 되는 거 맞나? 어제부터 하등 쓸모없었다. 또 폰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굽은 허리를 쭉 펴 기지개를 켰다. 저 멀리 구름 뭉치가 헐레벌떡 달아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무지개를 남기면서. 얼마 만에 본 무지개더라. 무지개 바로 아래에는 뭐가 있을까? 가보기로 했다. 구름이 지난 자리, 바람을 따라서.




어느 소설처럼 무지개 아래에 아름다운 무언가가 짠, 나타나면 좋았으련만. 나는 또 순수하게 그런 걸 기대했다. 무지개 아래에는 8차선 도로가 있었고, 사람 하나 없이 차만 쌩쌩 달렸다. 땀에 절어 뒷목이 축축했고 발은 얼얼했다. 매연 냄새에 코가 아팠고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노이즈 캔슬링을 켰다. 음, 낭만 없네. 이곳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었으니까. 현실은 이렇다. 낭만 하나 없이 고생만 잔뜩 하게 되는 곳.


그래서 별로였나? 아니, 좋았다. 3시간 동안 걷는 길에 놀이터에 들러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었다. 작은 골목에 핀 수국도 보았다. 편의점에 들러 화장실을 썼는데, 땀에 벌게진 내 얼굴을 보고는 ‘오늘 참 덥죠?’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점원과 같이 웃기도 했다. 듣고 싶은 일본 노래도 틀어 따라 불렀다. 무엇보다 걷는 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담았다. 무지개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하니까. 그 과정이 참 좋았다. 구글맵으로 도착지를 찍고 지하철을 타고 왔다면 못 봤을 거다.


살아가는 데 있어 결과가 중요할까, 과정이 중요할까? 누군가 갑론을박을 하고 있을 때 누구는 중용을 외쳤다. 둘 다 중요한 거, 누가 모르나. 말이야 쉽지. 정말 말만 쉽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요. 그래서 성적표 좀 볼까? 합격했어? 승진했어? 매출이 좋아? 모아둔 돈은?

사회 속 나는 무지개 아래 8차선만 봤다. 아이들과 수국과 점원과 하늘은 매캐한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실패로 가득한 일기장을 꺼냈다. 이건 결과가 안 좋아 실패, 이건 결과가 안 좋을 것 같아서 마무리를 하지 않아 실패. 결과에 집중하는 건 쓸모없는 완벽주의만 득시글거리게 했다. 그러게, 중용이 중요하다니까. 한쪽으로 치우치니 그렇지. 한껏 순해진 그가 다가와 혀를 찼다. 이제 알겠어? 네가 뭐를 놓쳤는지? 그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꿈지럭거렸다. 짤랑이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래, 나 지금까지 실패만 한 건 아니라는 건 알겠어. 놀이터와 꽃과 사람들을 놓쳤지.

그는 유쾌하게 웃더니 열쇠를 하나 건넸다. 찰칵. 족쇄가 하나 풀렸다.

그래, 잘하고 있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슴이 울렁했다.

공포인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줘? 날 괴롭히던 거 아니었어? 넌 누구야?

그는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언제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