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사람인 동시에 좋은 에디터이고 싶다.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나의 정체성 중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직 미숙하고 뭐 하나 이룬 것 없는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내세울 만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생각조차도 미숙한 것일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가를 꿈꿨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나는 지금도 예술가를 꿈꾼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나에게는 ‘일반적인’ 재능, 그러니까 ‘그림을 잘 그림’, ‘노래를 잘 부름’, ‘절대음감’과 같은 것들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재능이 나에게도 있다고 믿으려 노력했다. 내 속 어딘가에는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나 예술을 사랑하는데, 그것이 없을 리가 없다고.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일반적임’에서 벗어나고자 예술가를 꿈꾸었지만, ‘일반적인’ 재능을 찾고 있었다니.
아무튼, 예술가를 꿈꾸기 시작한 이래로 나의 꿈은 언제나 예술가이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부터 ‘평가’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였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에 찬물을 끼얹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싫다. ‘평가’는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술에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없다. 평가의 ‘평’자가 들어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싫다. ‘서평’, ‘평론’, ‘비평’과 같은 단어들을 들을 때면 마음속에 왠지 모를 반감이 인다.
그런 내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하며,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다른 이가 만들어낸 것에 관한 내 생각을 피력한다. 작품을 감상하며 느꼈던 감정을 논하며, 뛰어나다 생각했던 부분에 찬사를 보내고, 조금 아쉽다 싶었던 부분에는 나름의 피드백을 제안한다.
변명할 여지 없는 비평 활동이다.
그렇게 나는 지금 평론 글을 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활동이 평가가 아니길 바란다. 그저 ‘감상’이길 바란다. 다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그것을 ‘비평’이라 칭하기로 하자.
나의 비평 활동은 예술활동이다. 나에게 예술은 ‘자기표현’이고, 나는 비평 글을 쓸 때 나 자신을 있는 힘껏 보여주려 노력한다. 예술은 한 가지 제한 조건이 있고, 나머지는 자유로울 때에 가장 발현이 잘 된다고 믿는다. 한 가지를 정하고 글을 쓰는 에디터 활동은, 훌륭한 작업환경을 마련해준다.
따라서 나에게 에디터 활동은 예술활동이다. 나는 솔직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예술이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나는 글을 쓸 때 나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나는 ‘평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활동이 ‘평가’인 이상, 누군가는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글을 쓸 때면 나의 평가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그 두려움은 내가 솔직해지고자 하는 것을 저지한다. 좋은 에디터가 되고자 하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일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니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찾아온다.
나는 내 글 서두에, 특히 그것이 누군가의 창작물에 관해 논하는 글일 때, ‘이 글은 평가가 아닌 감상입니다.’와 같은 말을 붙여 두곤 한다. 이 구절은, 내가 솔직한 예술이 되지 못함에 대한 변명이고, 창작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고 싶어하는 나의 발버둥이다.
얼마 전 아트인사이트 대표님과 티타임을 가지고 왔다. ‘좋은 사람 VS 좋은 에디터’, 이 고민은 내가 항상 끼고 다니는 렌즈나 안경과 같은 것이다. 끼지 않고서 글을 쓴 적이 없다. 자연스레 대표님께도 이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대표님께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말씀을 해주셨다. 프로는 그것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접하는 예술 작품의 창작자들은 보통 전문가이다. 그것이 거친 비난이나, 인신공격과 같은 비윤리적인 것들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정당하고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비평이라면, 창작자는 전문가로서 상처가 아니라 피드백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나는 글과 말을 매체로 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나의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것을 걱정하여 숨기만 하는 것은 전문가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아니다. 또, 나의 솔직함에 누군가가 비판을 하여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전문가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나의 역할은 솔직함을 피력하는 것이고, 그것을 전적으로 감내할 수 있을 때에 나는 좋은 에디터, 좋은 예술가, 뛰어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때는 나에게 찾아들 비판 역시 감내하고, 피드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처의 다른 이름은 성장이다. 앞으로도 글을 쓰며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항상 상처를 치료할 연고와, 더부룩한 속을 달래줄 따뜻한 핫팩도 건네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나 역시도 상처를 줄 것을, 상처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솔직함을 보여주고, 오가는 상처를 버텨 내어 성장할 수 있어야겠다. 솔직하기에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 동시에 상처가 대책 없는 절망이 아니라 성장을 안겨줄 수 있게끔 유도하는 사람. 그것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에디터’인 듯하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