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당신이 까먹은 사과를,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가? 사피엔스는 수차례 사과를 ‘까먹어’ 왔으며, 이는 분명히 우리의 유전자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다.
사과는 상징이다. 인류 ‘3대 사과’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 세 사과는 '아담과 하와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이다. 최근 들어서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도 가세했다. 네 사과 모두 무엇인가를 상징한다.
첫 번째 사과는 '아담과 하와의 사과'이다.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흔히 사과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선악과’만큼은 건드리지 말 것을 명받는다. 하지만 뱀의 꾐에 넘어간 하와, 그리고 하와에게 설득당한 아담은 사과를 베어 물고 만다.
이 사과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것을 아주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욕망의 결과 역시 뚜렷하게 나타난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를 따르자면 이로 인해 그들은 낙원인 에덴에서 추방당했으며, 신은 그들에게 ‘남자와 여자가 대대로 원수가 될 것임’이라는 저주를 부여했고, 여자에게는 특히 ‘잉태하는 고통’과 ‘남편을 사모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어준다.
인간이 사과를 베어 물 것을 부추긴 뱀에게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 것’이라는 특별한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창세기의 이 부분에 관하여 불만과 의문이 많지만, 본 기고문의 목적은 이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므로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욕망을 베어 물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그들이 사과를 까먹었다는 것을 까먹게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두 번째 사과가 인류 앞에 나타나니 말이다.
두 번째 사과는 '뉴턴의 사과'이다. 뉴턴의 사과는 작게는 ‘만류 인력의 법칙’의 발견을, 크게는 ‘과학혁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뉴턴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그의 선배가 ‘사과’를 까먹었음을 까먹었고, 그 역시도 새로운 사과를 베어 물었다.
‘절대적인 악’이라 볼 수 있을 첫 번째 사과와는 달리, 두 번째 사과는 그저 ‘나쁘다’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저 ‘좋다’라고 말할 수만도 없다. 뉴턴이 불을 붙인 과학혁명은 거의 모든 학문적/실용적 분야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왔다. 기술이 발달했고,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졌다.
뉴턴이 불을 붙인 과학혁명은 거의 모든 학문적/실용적 분야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왔다. 멀리 내다보자면, 이로 인해 대량살상무기가 개발되었고, 산업혁명을 빙자한 인간소외가 심화하였으며, 공장식 축산이 시작되었고, 환경파괴가 극심해졌다. 인간과 동물의 삶, 그리고 지구 환경은 더욱 피폐해지고 ‘불편’해졌다.
세잔의 사과는 위의 것들과 결을 조금 달리하긴 하지만, 역시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사과를 그림으로써 한 사물을 다양한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음을 알렸다. 그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길 원하였다. 세잔은 미술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세잔 역시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는 '다양한 시각'을 담아내길 원했고, 후대 화가들은 그를 계승하며 점점 더 극단적으로 다양한 시각을 담아냈다. 현대 예술계를 고려하며 그의 사과를 바라보자면, 세잔의 사과는 예술 애호가들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환호와 이에 무관심한 대중의 예술계에 대한 몰이해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사피엔스는 네 번째 사과를 베어 물고 있다. 바로 ‘스티브 잡스의 사과’이다. 이제는 현대 문명인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스마트폰’. 이것이 ‘편의에 대한 욕망’을 상징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사과를 반밖에 먹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먹지 못하였다. 네 번째 사과의 본격적인 면모는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인공지능’이다. 인간은 다시 한 번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냈다. 이전의 사과를 까먹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까먹었고, 새로운 사과를 베어 물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사과는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내려줄 것인가? 또, 우리에게 어떤 고난을 안겨줄 것인가?
이처럼, 우리는 고민 끝에 매번 사과를 까먹기로 했다. 사과를, 사과의 의미를, 사과가 불러온 축복을, 사과가 불러온 재앙을. 그리고 새로운 사과를 따낸다.
서론이 길었다. 무용극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는 바로 이 내용을 다룬다. 전체적인 흐름은 크게 ‘태초의 사과’인 ‘아담과 하와의 사과’의 장면과 ‘가장 현대적인 사과’인 ‘스티브 잡스의 사과’를 다루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사과를 다루는 부분에서 주요 인물은 셋이다. 아담, 하와 그리고 뱀. 스티브 잡스의 사과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다만 '뱀'은 사라지고 ‘인공지능’이 새로 등장한다.
가장 눈여겨볼 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담과 하와에서 ‘뱀’을 맡았던 배우가 이후 그대로 다시 등장하여 AI를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뱀’의 움직임 표현에 대한 창의력은 실로 놀라웠다. ‘(발 없이)미끄러져 기어 다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는 전동 휠에 엎드려 다리를 뱀의 꼬리처럼 휘저으며 '빠르게 기어다녔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이를 인공지능의 표현에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뱀’을 담당했던 배우는 그대로 다시 등장해, 이번에는 전동 휠에 똑바로 선 채로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뱀과 인공지능 모두, 사피엔스가 ‘사과를 베어 물도록’ 유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류는 발전했다. 그러나 인류만 발전했는가? 이제 ‘뱀’은 발도 없이 똑바로 서서, 인간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움직인다. 더욱 강력한 욕망을 베어 물어보라고 인간에게 권유하고, 인간은 이 유혹을 선뜻 받아들인다.
한 가지 더 짚어볼 장면은 바로 '하와와 아담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부분'과 '사람들과 인공지능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부분'이었다. 하와는 계속해서 아담에게 그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질문은 ‘네가 형태라면 무슨 형태가 되고 싶어?’였다. 아담은 ‘그 어떠한 형태도 아닌 형태’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후 사람들은 AI에게 질문을 쏟아붓는다. 그중에서는 인공지능이 무슨 형태로 존재하는지 묻는 말이 있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인공지능은, 자신은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아담이 원했던 그 형태를 그의 후손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답이 있는 문제’와 ‘주관’이 필요한 문제를 모두 질문한다. 수학 문제나 어떤 개념의 정의 등, ‘답이 있는 문제’에 관한 대답은 빠르고 정갈하게 제시하지만, 정부 정책에 관한 생각 등과 같은 문제에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질문이 계속될수록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라는 인공지능의 주관은 더욱 뚜렷해져 간다. 이는 어쩌면 어느 날에는 인공지능이 주관적인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가질 수도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본 극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본 무용극의 제목은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이다. 여기서 ‘까먹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사피엔스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과를 갈망해왔다. 그러고 난 후에는 벌을 받았다. 이후에는 그들이 사과를 까먹었으며(eat, 1번 의미), 사과를 까먹었기에 벌을 받았었다는 것을 까먹었다(forget, 3번 의미). 그들 앞에는 새로운 사과가 나타나고, 이번에도 그들은 새로운 사과를 까먹는다.
이처럼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연극의 제목 역시 매력적이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필자가 무용극을, 특히 현대무용 예술극을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텐데, 분명히 필자가 놓친 부분이 많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만큼은 절실하게 느껴졌다. 배우들의 무용, 그들의 몸의 움직임은 정말 경외스러웠다. 무용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터라, 몸의 움직임을 감상하는 것에서도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극의 거의 모든 부분이 말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인상을 더한 듯하다. 비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서사 작품에서 언어의 비중이 이렇게나 적게 차지함에도 아주 튼튼한 서사가 짜여질 수 있음에 감탄할 수 있었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