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올해의 작가상'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 ‘내일’에 관하여.
기고된 칼럼을 몇 개의 질의응답으로 짧게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짧은 질의응답에 흥미가 생기신 독자분께서는 꼭 제 글을 모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건강한 반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겨움을 주기 위한 예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섹스돌'은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정윤석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하고 있는가?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없다.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현실의 형상을 흉내 낸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일어난 일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
모르겠다.
-2020 올해의 작가상은 ‘모두를 위한’ 올해의 작가상이었는가?
아니다.
-필자는 ‘절대적 진리’에 기반하여 글을 썼는가?
전혀 아니다.
역겹다.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
역겹다.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 그것이 필자가 국립현대미술관 ‘2020 올해의 작가상’ 전시실 중 ‘정윤석 작가’의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리고 전시실에 있는 내내 필자는 끊임없이 역겨움을 느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필자는 ‘작가’가 역겹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작품'이 역겹다고 느낀 것이었다.
역겨움을 주기 위한 예술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이 적절했는가, 결과물이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했는가 등에 따라 그것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창작의 산물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역겨움을 안겨준 것'은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그렇고 수잔 발라동의 여성 누드 그림들이 그렇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렇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이 그렇다. 각각의 작품이 관객에게 안겨준 감정의 결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역겨움을 안겨줬다. 그러나 그 역겨움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었으며, 작품이 역겨웠던 이유는 그것이 당시 사회의 치부를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네는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남성 두 명과 (거의) 나체인 여성 둘을 한 작품에 담아내었다. 당시 주된 미술 감상자는 그림 속에 있는 부르주아 남성들과 같은 이들이었다. 마네의 사실주의 회화 속 감상자와 눈을 맞추는 나체의 여성은 ‘당신들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거 다 위선이잖아.’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기득 사회가 애써 숨기려 했던 더러운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작품은 부르주아 남성 관객들에게 분노라는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발라동은 ‘여성이 여성 누드를 그렸음’이라는 새로운 행위를 통해 ‘동시대’ 대중에게 거부감으로 인한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여성의 신체는 죄악이다'라는, 왜곡된 그리스도교적 관념에서 비롯한 당대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끄집어내어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인 역겨움은 효과적이었다. 그는 최초의 여성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그리고 발라동의 예술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전혀 역겹지 않다.
뒤샹의 ‘샘’은 ‘예술의 고고한 지위’라는 불문율을 건드림으로써,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은 허가된 욕망의 비윤리성을 보여주며 감상자에게 역겨움을 선사한다. 마지막 작품의 경우에는 '작품'이 역겹다기보다는 '일부 관객'이 역겨웠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관객의 행동마저도 작가의 의도였으며, 참여예술의 경우 관객 역시 작품의 일부이므로 작품이 역겨웠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 예술가들의 ‘감상자에게 역겨움 안겨주기는’ 적절했다. 그렇다면 정윤석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역겨움은 적절했을까?
현재 대중이 정윤석 작가에 보이는 반응과 마네와 뒤샹이 처음 작품을 공개했을 때의 반응이 비슷하다고 여기며, 정윤석 작가가 그들만큼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몇 차례 목격하였다. 그러나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이 ‘제2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될 수 있는가를 필자에게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은 긴 테이블 위에 장미, 빵, 포도, 가위, 칼, 장전된 총 등의 72가지의 물건을 올려두고, 관객들에게 그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한 행위예술 작품이다. 작가는 스스로 6시간 동안 관객이 물건을 사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검색을 통해 세부적인 행위예술의 경과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서 제시한 많은 ‘효과적으로 역겨움을 주는 데에 성공한 작품들’ 중 굳이 마네를 집어 비교하는 이유는, 두 작가 모두 남성이고, 어찌 되었든 작가가 그의 창작물에 담아낸 것은 ‘여성 나체 이미지’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작가의 작품 창작 의도와 반영물이 담아내는 것을 비교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우선 마네는 ‘기득권의 위선’을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것이 마네의 작품 창작 의도였다. 당시 사회의 ‘기득권’은 '부르주아 남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잘 차려입은 고상한’ 기득권 부르주아 남성들이,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비윤리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위선. 피지배계급(여성, 빈민 등)에게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가부장제를 엄격히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정작 그들은 매춘을 일삼았다. 마네는 그것을 숨김없이 보여주고자 했다.
심지어 마네도 돈 많은 남성 즉, 기득권이었다. 그의 행위는 일종의 ‘내부고발’이었고, 효과는 굉장했다. 관객은 역겨움을 느꼈고, 그의 그림은 일종의 ‘언론’의 역할을 했다. 심지어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떠나 내재적 작품성만 보더라도 훌륭하다. 그가 대중에게 선사한 역겨움은 그의 창작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했고, 따라서 그의 그림은 훌륭한 작품으로 남았다.
이제 정윤석 작가의 ‘내일’을 살펴보자. 정윤석 작가는 작품 설명, 작품 자체 그리고 작가 인터뷰에서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이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필자는 ‘내일’은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을 온전히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내일’(전시공간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작품을 총칭하여)은 크게 세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입구와 가까운 쪽(후면)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중국의 섹스돌 제조 공장의 모습을 담았다. 맞은편(정면)에서는 ‘AI로 정치를 하겠다’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한 정치가 ‘마츠다’의 이야기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인물 ‘센지’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상영된다. 측면에는 섹스돌 제조 공정의 순간순간이 포착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섹스돌 제조 공장’ 이야기는 3번 질문에서 다루도록 한다. 2번 질문에서 다룰 이야기는 ‘AI 정치가’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인물’의 이야기, 즉 정면의 다큐멘터리이다.
일본의 정치가 마츠다는 시의원 선거에 나가며 자신이 시의원이 되면 ‘무조건 AI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고 이야기한다. 정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AI가 정치를 하게 되면 인간을 위한 행위를 비인간에게 맡기는 것이 된다. 주제는 인간인데, 인간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공’적인 ‘지능’이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물론 인간이 ‘이루다 AI’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입힌 것처럼, 인간이 그것에 인위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입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인간 소외’를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답할 것이다.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은 ‘일방적인’ 욕망 해소를 위해 자유만을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이 ‘시체’와 함께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인간의 외형을 하긴 하였으나 그뿐이다. 시체와 다른 점은 시체를 구성하는 것은 단백질이고 섹스돌을 구성하는 것은 실리콘이라는 것뿐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되고, 그러므로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말한다. 정말 무책임한 말이다. 섹스돌 사용은 무책임한 욕망의 발현이다.
다른 인간과 함께할 자유에 대한 책임은 '체온'이다. 그 체온은 감정을 만들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체온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인간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이다.
정윤석 작가는 인터뷰 중 애초에 작가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을 담아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던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주인공은 섹스돌과 ‘함께 산다’라고 주장하지만, 작가의 인터뷰 중 말마따나 그의 집에는 숟가락도 한 개, 젓가락도 한 쌍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설명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그렇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인간 소외를 다룬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 작가가 작품과 작품 설명에서 보여준 것이 여기까지이다. 그래서 작품 감상자들에게 그러한 ‘오해’를 심어줄 수 있었다.
섹스돌은 100%에 가까이 여성 신체의 형상만을 한다. 섹스돌은 인간의 문제에 인간이 없는 상황이 아니다. ‘여성 상품화’의 문제에 ‘여성’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일’에서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 부분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여성 신체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 소외’와 ‘여성 소외’가 비슷해 보이는 것도 같다. 왜냐하면 다큐멘터리 ‘내일’에서 ‘섹스돌 아저씨’ 부분은, 확실히 ‘인간 소외’를 다룬다고 볼 수 있는 ‘AI 정치인’ 장면과 번갈아가며 보여지게끔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깊이 고민하며 보지 않으면 충분히 헷갈릴 만하다.
작가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작가의 의도가 교묘하게 엇갈려 있어 감상자에게 오해를 심어줄 수 있는 작품은 건강한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겨운 작품도 건강해야 한다. 그것이 필자가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대답부터 하자면,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아니다.’ 2번 질문에서는 작품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를 다루었다. 3번 질문에서는 작품에 대한 비난이 건강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루어보고 싶다.
정윤석 작가가 전시한 것은 ‘섹스돌 제작 과정’이지 ‘섹스돌’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개념이 있는데, 바로 ‘재현’과 ‘현실 담기’, '모방' 그리고 ‘실물’이다. 앞서 제시했던 질문 중 일부를 다시 떠올려보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없다.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현실을 흉내낸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일어난 일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위의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자도 모르는 불변의 진리를 필자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글을 썼음을 밝힌다.
필자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목격한 대중의 정윤석 작가에 대한 비난의 이유는 ‘섹스돌을 전시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개의 섹스돌도 전시하지 않았다. 그가 전시한 것은 오직 ‘섹스돌 제작 과정’이었다. 그는 단 한 개의 섹스돌 ‘실물’도 가져오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섹스돌 제작 과정을 ‘재현’하지 않았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으나 셋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수월한 이해를 위하여 필자는 본 사안을 현재 활발히 진행 중인 동물해방운동과 비교하여 살펴보려 한다.
동물해방론자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 문장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그래서 동물해방론자들은 공장식 축산, 상업적 어업 등을 모두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부터는 반대가 많아진다. 반대가 더 많다. 그러나 앞의 문장에는 찬성하고 뒤의 문장에는 반대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모순적인 일인데, 가장 많은 ‘동물학대’가 이루어지는 곳은 ‘개 도축장’이나 ‘펫샵’이 아니라 소/돼지/양/닭 등의 도축장(공장식 축산)과 바다 및 양식장(상업적 어업)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육류 소비를 줄일 것을 주장하기 위해 도살장의 ‘풍경’을 담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공장식 축산 과정에서의 동물학대 실상을 알린다. 동물을 학대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동물이 학대당하는 장면을 담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지언정 ‘재현’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공장식 축산과 상업적 어업으로 인한 동물 학대 실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동물 한 개체를 더 살해하도록 유도한다면(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적인 일일 것이며, 새로운 폭력을 생산하는 데에 가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건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벌어지고 있는 일을, 현실을 ‘담을’ 뿐이다.
그렇다면, 새로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 장면을 담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마저도 폭력이라면, 모든 언론을 폭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언론의 역할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재현’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 담기’는 폭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섹스돌 공장이 운영되는 것에는 작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저 일어나는 일이다. 공장과 작가 간 상호동의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담는 것, 그 행위 자체는 차라리 언론이었을지언정 폭력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폭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애초에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한 것이 아니므로 ‘섹스돌을 전시했음’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음은 현실의 모방에 관한 고민을 할 차례이다. 분명 실리콘인 것을 아는데도,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하듯 섹스돌 공정 과정에서는 '인간이 물성을 이기려 하는 작업'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정말 역겹게 보인다. 상상 이상으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났다. 다시 한 번, 작가가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장면이 역겨운 것이다. 그 장면은 마치 제조자가 여성의 신체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윤석 작가의 전시실에서 무엇을 전시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대략적으로는 인지한 채로 전시실에 입장했다. 따라서 영상과 사진에 나오는 ‘살점 같은 것’은 ‘실리콘’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리콘을 누르고, 자르고, 찢고, 주무르는 과정은 필자의 속을 메스껍게 했다. 붉은 색소가 발린 실리콘이 그라인딩되는 장면은 특히 역겨웠다. ‘살점 같이 생긴 실리콘’이 ‘피 같이 생긴 붉은 색소’와 함께 갈려 나간다. 생김새가 비슷하기에 살점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따라서 역겨웠다.
비슷한 이유로, 제조 공정이 포착된 사진들이 여성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것과 유사하기에 그것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합리적인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진들이 ‘여성 신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섹스돌 사용을 옹호한다’와 같은 비난 역시 있는데, 그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전시실에 전시된 사진은 섹스돌 제조 과정이 얼마나 흉측한지를 보여준다. 인류 보편적 윤리 규범이 내재된 사람이라면, 심지어 섹스돌 구매 의사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섹스돌 사용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할 공간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비슷한 장면을 보임으로써 트라우마를 일으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 역시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결코 실제는 아니나 실제와 유사한 장면이 줄 수 있는 폭력성'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생명 윤리에 기반한 비거니즘과 관련된 논의와 엮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체육(식물성 단백질)'의 문제와 아주 유사한 결을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대체육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고기와 아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대체육도 먹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비건 역시 존재한다. 생명 윤리를 이유로 비건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고기의 ‘모양’만 보아도 도살장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결코 고기는 아니지만 고기 모양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분명 '고기 모양'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육을 고기의 모양으로 만든 것은, 결국에는 어쩌면 ‘고기는 좋은 것’이라는 소수자를 존중하지 못하는 흔한 실수를 다시 범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에 ‘비건’을 해시태그 하고 대체육 사진을 올리는 것도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필자만 하더라도 대체육을 포함한 고기 모양을 보면 머릿속에 도살장의 풍경이 떠오른다. 다만 대체육임을 확인하면 안심하는 편이고 대체육은 좋아하며 잘 먹는다.
비슷하게 생각해보자. 본 작품 속에 담은 것은 분명 여성의 신체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 모양을 한 실리콘이다.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결코 단백질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여성의 신체와 아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섹스돌을 사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필자를 포함하여) 존재한다. 결국에 섹스돌은 여성 신체의 상품화가 극단에 이른 결과물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것이 ‘진짜 여성의 신체이길 바라며/상상하며’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체육 사진을 비건에게 보이는 것과 섹스돌 사진을 여성에게 보이는 것. 두 사안은 논리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심지어 동물해방론을 지지하는 비건 지향인인 필자만 하더라도 위의 두 사안을 동일선상에 올려두고 관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필자도 지금 정윤석 작가와 비슷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에게 ‘현실을 흉내내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모르겠다’라고 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에 관한 고민을 할 차례이다. 물론 언급하였듯, 정윤석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정윤석 작가가 섹스돌 자체를 전시하였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었을까?
우선 전시를 위해 '새로운' 섹스돌을 주문을 한다면, 더 깊게 생각할 여지가 없이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재현’이 폭력이 될 수 있음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만약 작가가 ‘전시를 위한 새로운 섹스돌’을 주문한다면, 불필요한 새로운 폭력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버려진 것들을 주워와 작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한다면? 그때도 폭력이 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시작하였을 때 필자는 데미안 허스트의 ‘분리된 엄마와 아이’ 작품이 생각났다. 해당 작품은 문자 그대로 엄마 소와 아기 소를 수직으로 잘라 박제시켜둔 작품이다. 소의 장기가 MRI사진과 같이 (다만 실물으로) 다 드러나 있으니 비위가 좋지 않으면 찾아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몇 차례 찾아본 필자 역시 볼 때마다 메스꺼움을 느낀다.
허스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소를 죽였는지, 아니면 죽은 소를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필자의 자료 탐색 능력은 허스트가 ‘죽은’ 동물을 사용한 것인지 동물을 ‘새로이 죽여’ 작품을 만든 것인지 정확히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허스트는 ‘육식 지향인’의 이중 잣대를 효과적으로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햄버거의 패티 역시 소의 시체였고, 그가 전시한 것 역시 소의 시체였다. 어떤 소의 사체는 ‘맛있는 것’,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어떤 소의 사체는 ‘역겨운 것’으로 여기는 대중의 이중성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는 있지만 그의 비판은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위대한 작품'으로 남았다.
만약 허스트가 동물을 새로이 죽여 '재료'로 쓰기 위해 가져왔다면, 정윤석 작가(혹은 다른 작가)가 섹스돌을 새로이 생산해 '재료'로 쓰기 위해 가져온다면 차원이 다른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허스트가 죽은 동물을 ‘주워’왔다면, 정윤석 작가(혹은 다른 작가)가 버려진 섹스돌을 ‘주워’온다면. 물론 완성품이 허스트의 것과 같이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을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사고에 과부하가 왔고 필자의 뇌는 백기를 들었다. 무책임한 일이지만 이것에 관한 윤리성을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다시 한 번 필자가 갈 길이 멂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보다 더 나아가는 고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필자에게 공유해주길 바란다.
이러나저러나 확실한 것은, 올해의 작가상은 ‘모두를 위한’ 올해의 작가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2020년도의 올해의 작가상은 만 19세 미만은 배제한, '일부'를 위한 작가상이었다. ‘올해의 작가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수상 제도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공공'의 수상제도가 분명히 대한민국 국민(한국 국적 아동의 경우)이자 세계의 시민인, 아동(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른 아동의 범위로 지칭)을 배제한 것은 본 '2020 올해의 작가상'이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부분에 관한 논의도 있어야 하지는 않은가를 질문하고 싶었다. 올해의 작가상이 진행되는 동안 아동은 전시실에 입장조차 못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정윤석 작가의 ‘섹스돌 제작 과정 전시’를 보며, 그것을 본 대중들의 반응을 보며, 그리고 그것을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한 국립현대미술관을 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필자의 논리에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반론해 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것만 기억한다면 언제나 건강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