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언제부터인가 명절에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께선 무기력하게 힘 없이 누워계셨다.
그때는 노쇠해진 몸 때문에 그저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 그러신 줄로만 알았다.
나는 서울에서 일하며 아이를 돌보며 지내다 고향에 내려가도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마음 한편에 늘 할머니께 전화드려봐야지, 할머니께 찾아가 봐야지 생각만 하곤 실천에 옮기질 못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고 부모님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네? 할머니께서 치매라고요?"
왜 우리 할머니만큼은 계속 건강하시고, 늙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늙어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모두에게 예외가 없는 법인데, 우리 할머니에겐 예외이길 바라서 이런 일은 생각조차 못했던 걸까.
그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꿈속에선 부모님과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던 할머니댁 풍경이 나왔다. 카세트테이프로 동화를 틀어달라고,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고 엄마가 못 먹게 했던 과자도 어둑한 저녁 몰래 내어주시던 할머니.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할머니와 함께 먹고 자고 했었던 할머니방.
그리고 생각했다. 8살이 된 나를 늘 업어주셨던 자그마한 할머니의 등. 할머니께 업혀 동네를 다닐 때마다 "아이고, 다 큰 애가 할머니한테 업혀있네~"라고 한 소리씩 들어도 기어이 업어주시던 할머니. "우리 강아지 왔나" 라며 나에겐 가장 인자하고 환한 웃음을 보여주셨던 할머니.
작지만 든든했던 할머니의 등과 허리는 이젠 땅을 바라보며 휘었고, 함박 미소로 반겨주던 큰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젠 듣기가 어렵다고 한다. 식사도 거부하실 때가 많아, 살이 많이 빠지셨다고 했다.
하고 있던 여러 일들도 잠시 멈추고 아이를 맡겨두고 갑작스럽게 부모님께 연락하여 할머니를 찾아뵙는다 하였다.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었다.
몇 년 만에 할머니께 도착했다. 기력이 거의 없어 앉아 있기 조차 힘드시고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누가 와도 알아보시거나 인사하지 않으셨다는 할머니. 저 멀리서 나오는 할머니께서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강아지 왔다고??? "
할머니는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다행이었다. 마음속에 늘 할머니께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남아있으실 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마른 나뭇가지 같이 변해버린 팔과 손을 꼭 잡아드렸다. 살이 너무나 많이 빠지셔서 뼈가 드러나 있으셨다. 힘겹게 앉은 채로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고 계셨다. 진작에 많이 찾아뵙고 손잡아드리고 안아드릴걸. 더 많이 표현해 드릴걸.
"할머니, 저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셨던 것들 다 기억하고 있어요. 많이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 앞에서 이런 말들이 나왔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주신 무한한 사랑과 조건 없는 사랑들이 마음속에 늘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 말들은 언젠가 꼭 할머니의 귀에 직접 들려드리고 싶었다. 치매가 진행 중인 지금에서야 찾아왔지만, 손을 꼭 잡고 온 마음을 실어 할머니께 전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의 멍하고 힘없던 두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이젠 많은 말씀을 하실 힘도, 일어나 안아주실 힘도 없으셨지만, 할머니의 두 눈에서 내 진심 어린 마음과 표현들이 할머니께 가닿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여러 실패와 힘듦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줬던 것은 온전히 나에게 채워진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몸과 마음에 새겨진 할머니의 사랑. 함께 부대끼며 애정을 한껏 주고받았던 소중했던 그 시절의 추억과 사랑의 시간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지치고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 빠졌던 나를 다시 일으켜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내 삶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던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사다.
할머니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많은 사랑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할머니. 그리고 많이 사랑해요. 할머니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져 가도 이제는 할머니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의 말들이 새겨지길 바라요. 저는 할머니께 받은 그 사랑을 하나씩 꺼내어보면서 기억하고 추억하며 살아갈게요. 할머니께서 점차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또다시 찾아갈게요. 또 만나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