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직원이 10명도 안 되는 '소'에서 나 혼자 여자였던 적도 있었다. 18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아니 사실 누구의 일도 아니었을 테지만, 소장님 손님이 오시면 으레 직원들은 나를 쳐다봤다.
'자~ 커피 타야지 뭐 해?'
소장님은 나에게 '커피'를 부탁하셨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상해서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면 힘도 안 들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타인이 시켜서 하려니 괜히 더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하기 싫어도,
일하다 말고 커피도 타고 티 타임도 준비하고 과일도 깎고 탕비실 설거지와 간식 준비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사무실에서 먹는 여름 수박이 제일 싫었다. 크고 맛 좋고 시원한 수박을 준비해 준 누군가의 그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씻고 자르고 껍질까지 치워야 하는 수박은 정말 사무실에서 차려 먹기에 손이 많이 가는 과일이었다.
오늘 마침 최고참 계장님이 크고 탐스런 수박을 과 직원들을 위해 사 오셨다.
그리고 나를 따로 불러 오후에 수박을 잘라먹자고 하셨다. 나는 서무계장이고 여자라서 부탁하셨나 보다.
나는 혼자 능수능란하게 수박을 손질했다. 어찌나 먹기 좋게 잘 잘랐는지 칭찬도 받았다.
할 일이 산더미라 허둥지둥하면서도 수박 자르고 나누는 일은 내 몫이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또 서무계장이니까 해야 할 일일수도 있다 ^^;;)
맛있게 먹는 직원들 뒤엔 씻고 자르고 뒤처리 및 설거지까지 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까짓 수박 자르는 거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평소에 피해의식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고정된 성 역할의 예상대로 일하는 누군가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힘든 마음이 조금은 생길 수도 있다.
남자 직원들이 수박 자른다고 나서면 맡겨둘 성격도 아니지만...
정말 퇴직하기 전에 수박 먼저 잘라주겠다고 나서는 남자 직원 한번 봤으면...
다음에도 역시 나서서 또 차려낼 수박이지만, 40대 중반 여자 직장인 나는 사무실에서 먹는 수박이 오늘은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