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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편지 1

by 다정한 포비

밤이 많이 깊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미루고 미뤄두었던 1년 치 병원비 영수증을 드디어 정리하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보험료 청구를 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구하면 돌려받을 수 있는데도 저는 왜 이렇게 하기 싫은 걸까요? 어쩌면 그건 저의 완벽주의 기질과도 조금 관련이 있겠지요. 순서대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면 좋았을 1년 치 영수증은 야속하게도 여러 군데 알을 쏙쏙 빼먹은 옥수수 같이 듬성듬성입니다. 그래도 머리를 대여섯 번 긁적이고, 의자에서 당장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세 번 참으니 겨우 정리는 마쳐졌습니다. 내일 몇 군데 병원과 약국을 더 들러야겠지만 말입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지요?


지난주에는 마치 봄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황홀했었는데, 오늘은 얄궂게도 다시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정말 감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모쪼록 건강에 유의해주세요.


물론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이 양계장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드렸던가요? 지금이야 무항생제 계란을 선호하지만 그 당시에는 닭들에게 항생제를 먹여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제가 그 당시에 항생제를 잘 먹은 닭의 달걀을 질리지 않고 꾸준히 많이 먹어서 어른이 되어서도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그 시절 양계장 이야기라면 들려드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가득하고도 한 보따리 더 있으니 앞으로 언제든지 시시하고 지루한 때에 청해주시면 재미있게 들려드릴 의향이 있습니다.(웃음)


그리고 최근에 감기 걱정을 덜 하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전과 같지 않게 요즘은 운동을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더 하고 있습니다.

5월에 열리는 여성 마라톤 대회에 덜컥 참가 신청을 하여 준비 시늉이라도 내보고자 조금씩 달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기를 좋아하시나요?

예상하시는 것처럼 저는 몸이 크고 무거워서 잘 달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에게 달리기가 필요한 때는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를 휘휘 내저어도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들이 쉬 떨어져 나가지 않을 때에는 맥주 두어 캔보다 오히려 달리기가 맞춤 처방약처럼 잘 듣는다는 것을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달리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서늘한 밤하늘에 초승달이 덩그러니 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른 김에 인터넷에서 검색한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법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상체를 5-10도 가량 수그리고 호흡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팔을 가볍게 흔들어 주십시오. 발 뒤꿈치는 땅에 살짝 닿는 정도로 달리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아직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척척 들러붙고 왜인지 양쪽 정강이가 아프지만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진도를 내보려고 합니다. 5월에 반가운 소식을 들려 드릴 수 있도록요.


병원비 영수증을 정리하다가 터지는 속을 삭이려고 쓰기 시작한 편지 글이 길어졌습니다. 머릿속에 차고 넘치는 생각과는 다르게 도무지 진척이 없는 요즘이지만 내일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골칫덩어리 보험료 청구는 끝낼 수 있겠지요.


그 사이 밖에는 눈이 내렸네요. 계시는 그곳에도 좋아하시는 눈이 왔을까요?


모쪼록 따뜻하고 편안한 밤 되시기를 바라는 소중하고 고운 마음을 가득 담아 보냅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글을 드릴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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