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역한 아들은 기숙사 입소를 거부하고 기어이 자취의 길을 선택했다.
보증금 천에 월세 60의 자그마한 원룸을 구했는데, 보증금은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해결하고 용돈은 알바해서 충당할 테니 월세만 지원해 달라고 하는데 솔직히 기숙사 비용이나 월세나 별 차이가 없긴 하지만 문제는 식비인 것이다.
내가 남미에서 삽질하고 있는 동안 아들은 자취방으로 이사했다.
자취한다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귀국 후 잠깐 만난 아들에게 '반찬 해 줄까?' 물었더니 냉장고가 너무 작다며 한사코 거부한다.
비교적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던 3월 어느 날 문득 든 생각
주말만 나가는 오뎅집 알바로는 학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을듯한 생각이 불현듯 스치면서 아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불안감을 품은채 무작정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학시절 자취할 때부터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까지.. 아니 아직까지도
엄마는 항상 내가 밥 굶을까 봐 걱정하며 온갖 밑반찬들을 보내주셨는데, 제대로 먹지 않아 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세 가지 정도의 국과 찌개, 열 가지 정도의 반찬
뚜벅이라 대중교통으로 정말 힘들게 이고 지고 아들방 냉장고에 촥촥 쌓아놓고는 기진맥진하며 다짐한 것은 이리 개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앞으로 절대 아들을 위한 요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나, 찬장을 가득히 채운 라면, 그리고 분리수거함에 빼곡히 담긴 라면 봉지들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두 번째 요리를 배달하며 반찬통을 수거할 때의 결과는 놀라웠다.
아들은 대부분의 음식을 다 먹어치웠던 것이다.
놀라웠다라는 뜻은 아들은 집밥 극혐 외식 찬양 스타일이라 학창 시절 집밥은 거의 먹지 않아서 거부했던 전력이 있어서였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지 않고 썩은 채로 방치되었으면, 이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기대(?)했던 일말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아들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난 한 달에 두 번 정도의 고된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음식 배달은 힘들다.
10킬로는 족히 넘을 음식을 지하철 두 번 갈아타며 대중교통으로 날라주는 노동은 상상 이상이다.
조금씩 꾀가 생기면서 애들 아빠를 활용하기도 하고, 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택배 시스템을 이용해보려 한다.
잘 먹는 것들, 그리고 남기는 것들을 파악해서 매번 메뉴를 업그레이드하는 과정도 고역이다.
그래서 엄선한 음식들을 받는 아들은 이런 엄마의 심정을 알기나 할까?
이번 추석에 친정 들르며 이보다 더한 짐을 지고 왔다.
전복, 홍합, 오징어뿐 아니라, 울릉도 텃밭에서 수확한 올망졸망 야채들까지
일단 엄마는 물어본다.
'이거 먹을 거야?'
잘 먹지 않을 듯 하지만 일단 달라고 한다.
그러면 아빠는 딸년은 다 도둑년들이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먹거리를 꾸리는 표정이 즐겁다.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자식에게는 그냥 주는 게 낙이라는 거
그리고 자식은 부모가 준다는대로 받는게 효도인 것이다.
지금 팔순인 엄마는 구순이 되어도 딸을 위한 음식 보따리를 꾸릴 것이다.
나 또한 아들이 장가가도, 내가 팔순 구순이 되어도 아들을 위한 먹거리를 준비할 것이다.
엄마라는 직업이 힘들다는 것은 내가 숨을 끊어야 비로소 그 정년이 끝난다는데 있다.
음식 배달을 위해 방문했던 아들 방
아들은 없고 시커먼 사내 두 명이 있어서 적잖이 당황했는데, 아들 친구들이었다.
내가 재워준 LA갈비를 구워 먹기 위해 부른 절친들이었는데, 갈비 잘 먹었다며 꾸벅 인사하는 귀염둥이들을 보니 내 아들 입에 들어갈 거 나눠먹었다는 아쉬움보다 엄마가 해준 LA갈비 생색내며 먹었을 아들의 자부심이 느껴져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그 이후의 요리는 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취생들이 나눠 먹을 만한 음식들로 바뀌어갔다.
아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그에 따라 내가 해주는 음식들의 취향도 바뀌겠지..
그 중심에는 아들에 대한 엄마의 세심한 사랑이 바탕이 되었음을 아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모를 듯 하지만 난 오늘도 아들을 위한 요리를 구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