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대가족의 사진이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진행하는 사촌모임의 사진이다.
울릉도에서 시작된 작은 가족이 있다.
우리 아버지대는 시대를 잘못 만나 속된 말로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성리학의 대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그들의 후손들은 공부든 사업이든 일취월장하여,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천룡이라던가 흙수저 성공 신화를 일궈냈다.
(여기서 항상 등장하는 멘트.. 나만 빼고)
엄마 쪽 사촌들은 같은 동네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울릉도에서 소위 말하는 BR친구 격으로 함께 뒹굴며 놀았던 기억과 더불어 고딩시절 외할머니댁에서 유학생 단체 하숙생활도 했던지라 비교적 친근한 감이 있었지만, 출신 동네도 달랐고 (울릉도 생각보다 넓다) 일찌감치 육지에 자리를 잡았던 아버지 쪽 사촌들은 몇 년에 한 번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만 봤던지라 아무래도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삼촌과 숙모의 동반 폐암 판정 소식을 들었다.
폐암이란 것은 선고와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는 병이 아니었던가?
폐암의 원인도 눈물 날 정도로 기가 막혔다.
별다른 재주가 없어 소규모 자영업을 전전하던 시절
실내포차를 운영했던 적이 있었는데 (워낙에 많은 자영업을 전전했던지라 실내포차 운영은 나도 폐암 판정 듣고 처음 안 사실이다)
좁디좁은 부엌의 환풍기가 고장 났더랬다.
워낙에 가난해서 환풍기 수리할 비용도 없었던 삼촌과 숙모는 몇 달을 생선 굽는 연기에 콜록거리며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 폐암의 원인이었다.
불로장생은 진시황조차 실패한 프로젝트였지만, 자본이 신이 된 지금의 세상에서
돈은 의학보다, 기도보다, 더 오래 숨 쉬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가난은 단지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의 가난은 결국 수명을 단축시키는 확실한 처벌이 되었다.
사촌들과 서먹서먹한 것과 별개로 난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 형제들, 그러니깐 삼촌과 고모와는 상당히 친했고, 그에 딸린 숙모와 고모부와도 각별했다.
하.. 어떻게 삼촌과 숙모를 동시에 보내드리나?
그 집 큰딸인 사촌 A 만큼 나 또한 희망이란 이름의 실 한 가닥을 쥔 채, 끝이 보이는 길 위에서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서로 정보를 공유해 가며 수술 가능성을 타진하며 병원들을 전전할 때
서울삼성병원에 온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 나가 암환자에 좋다는 건강식을 나눠 먹으며 좋은 결과를 기대했더랬다.
원래는 숙모의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야말로 3개월 시한부 선고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결과를 듣는 순간 삼촌은 숙모를 안고 허리 끊어져라 몇 바퀴 돌리며 기쁨을 표시했고 천만다행으로 숙모는 그날 수술 날짜까지 잡아 무사히 진행되었지만 수술은 불가하고 항암치료 밖에 받을 수 없었던 삼촌의 상태는 나날이 위중해졌다.
그러던 중 단톡방이 만들어졌고 *월 *일 어른들까지 모신 사촌모임을 진행한다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4년 전 추석
중국에 있는 여동생네 빼고 전부 모였다.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넓은 규모의 한옥마을에서 첫 사촌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도착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 저녁 식사를 하기 전 A가 우리를 커피숍에 모이라고 안내를 하는데, 이것이 전부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었다.
커피숍 2층 소규모 강당처럼 세팅된 곳에서 다들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는데 갑작스레 빔프로젝트가 쏴지면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이승구할배, 이순임할매의 사진부터 시작하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포토 시리즈들이 보인다.
지금 생각하니 음악은 김광석의 '가족사진'이었던듯하다.
프로젝트 상연이 끝난 그곳에 있던 우리 모두의 눈에는 추억에 젖은 물기가 촉촉이 맺혀 있었다.
그날의 모임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았을까?
그 이후 둘째의 결혼식까지 치른 삼촌은 사명을 다 했다는 듯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겨울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삼촌은 돌아가셨지만 삼촌이 빠진 우리 모임은 얼마 전 4회 차 모임을 진행했다.
삼촌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4년 전의 사촌 모임은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하늘나라로 가기 전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려는 A의 의도는 이 모임을 매년 개최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매년 일정 회비를 적립하자고, 그리고 회장 부회장, 총무까지 술자리에서 구두로 결의되었다.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 년을 잡고 계획을 세웠으며 빠짐없이 모여 우애를 다졌다.
총 멤버 42명
올해 중국에 있는 여동생 가족 빼도 35명이 모였으니 정말 훌륭한 참석률이다.
운영 방식도 많이 바뀌어, 이번에는 수고를 덜기 위해 외식을 하고 뒤풀이로 술 한잔을 하기 위해 가장 큰 방으로 모여서 부지런히 술과 안주거리를 챙겼다.
술로 다져진 정을 나누는 시간
건배사는 항상 큰아버지인 우리 아버지가 하신다.
건배사 중에 항상 끼는 말
'동생 둘을 보내서 마음이 아프지만..'에 다들 가슴 아파하고, 건배사의 마무리는 항상 똑같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이번 추석에 본 엄마, 아빠는 한 뼘 더 늙어 있었다.
이번 섬산행에 죽을뻔한 고생을 했고, 예정된 버스를 타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구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버스에서 YTN뉴스를 반복해서 보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이 유서에 가장 많이 남기는 말이 '엄마, 아빠'라고 한다.
죽음이란 것을 그리 많이 접해보지 못했지만, 내가 먼저 죽는 상황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엄마, 아빠에게 사과를 해야 할 듯하다.
이미 동생 둘을 하늘나라로 보낸 아빠가 자식이 먼저 죽는 꼴은 보지 않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난 늘 자랑하고 싶은 게 있다.
가족은 당연히 화목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이유가, 우리는 비록 다들 가난했지만 콩 한쪽도 나눠먹었던 의리파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여읜 A는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내가 부모님 챙기는 것보다 더 살뜰히 챙겨준다.
아직도 찢어지게 가난한 A의 엄마 숙모는 내가 큰 조카라 각별하다며, 나를 볼 때마다 용돈을 찔러준다.
숙모보다야 좀 낫지만 그래도 가난한 고모랑 만나는 날, 고모는 무족권 어른이 내야 한다며 내 돈은 일원도 못쓰게 한다.
가족이 사기 칠 수도 있고, 돈 때문에 칼부림 날 수 있다는 것은 결혼해서 알게 된 일이었다.
사촌끼리 화목한 가족이 정말 드물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기에 늘 자랑하고 싶다.
'이렇게 화목한 가족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