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아줌마는 되기 싫었던 여자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기까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보통 아줌마와는 달라 보여야 한다는 허세끼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힘들고 고달프고 노가다 격인 인솔자의 업을 여행을 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돈까지 버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멋진 여성으로 포장해 플렉스 하며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의 나도 온통 허세 투성이다.
별 볼일 없던 울릉도 출신이 보는 세계는 좁았다.
지금에 와서 회고해 보자면, 울릉도가 아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훨씬 더 넓은 시각을 가지며 자랐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더 잘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에'라는 상상 놀이를 하는 건 자유. 지금에 와서야 뭔 말인들 못하겠나?)
왜냐면 그 당시 내가 꿈꿨던 멋진 여자는 티비에서나 보던 사원증 목에 걸고 빌딩숲을 활보하는 커리어우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커리어우먼이 인생 목표가 되었다.
어찌어찌하여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외국계 금융회사에 입사하면서 삐까번쩍한 금융사 건물을 드나드는 '멋져 보이는 커리어우먼'의 세계에 입성하는 것은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
'외국계 금융회사'란 것이다.
별다른 자산이 없었던 내가 허세의 최고봉으로 친 건 바로 언어였다.
중학교 때 배운 ABC를 시작으로 철저히 시험 위주의 영어만 읽고 쓸 줄 알았던 내 또래들 사이에서, 블라블라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리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영어 스피킹을 잘한다는 능력은 어학연수를 다녀왔거나, 원어민이 가르치는 비싼 스피킹 학원에 등록해야 했던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기에, 없는 형편에 선택한 영어공부법은 짠내 나는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이었지만, 꽤 도움이 된듯했다.
그리고 한창 빠져들었던 할리우드 영화
키아누 리브스 같은 초미남을 만나려면 작업을 걸든 작업에 걸리든 일단 대화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백마 탄 왕자님을 영접하는 꿈을 안고 알음알음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잡지책 찢고 나온듯한 외국인 만나고 싶어 공부했던 영어는 내 인생에서 뜻밖의 장소에서 빛을 발했던 것이 입사 인터뷰에서 요구했던 '영어로 자기 소개하기'였다.
하지만 그 당시 영어 수준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이었다.
프로그래머들이 영어를 잘할 가능성은 고양이가 영어로 자기 소개할 확률 정도이니 걔 중에서 눈에 띄었을 테고, 그니깐 딱 합격할 만큼이 생존 영어였던 것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고사하고 더듬더듬 생존 영어는 홍콩에서 자주 출장 오는 캘빈과 약간의 썸을 탈 정도만 유지되었다만, 그나마 그 썸도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캘빈이랑 잘 되었으면 지금쯤 이수정 뺨치는 홍콩댁이 되어 있었을 텐데, 내 팔자인걸 어쩔..
결혼도 했고 영어를 공부하기 위한 원동력이었던 키아누 리브스를 만날 확률은 제로에 수렴했지만, 직업도 없는 아줌마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건 화려했던 경력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단녀들 경력이 화려해서 딱히 내세울 게 없긴 하다는..) 그래도 남보다 조금 더 낫다고 자부했던 영어실력이었기 때문에 영어의 끈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영어공부는 시종일관 돈이 거의 안 드는 방송매체를 활용했지만, 그렇게 갈고닦은 영어가 영 쓸모없지는 않아서 외국여행을 하는데 나 영어 좀 한다고 뽐낼 수준은 되었다.
내가 직장 그만둘 당시 최고의 커리어를 달리던 남편은 그 커리어를 끝으로 정점을 찍고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줄어든 수입으로는 커가는 얘들을 키우기에 감당할 수 없었던지라, 드디어 직업 전선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눈높이 좀 낮춰 취업하려면 얼마든지 취업 가능한 상황이었다.
몇 군데 면접도 봤지만 여전히 외국계 회사만 고집했었고 결정적으로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거처를 파주로 옮겨 더욱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내심 떨어지길 원했던 것은, 다시 프로그래머의 세계에 뛰어든다면 평생 이 일을 해야 할 듯한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사는 인생, 두 번째 일은 좀 더 재미있는 일로 마무리하고 싶었고, 일하기 싫은 마음이 무의식 중에 들켰는지, 면접관은 단번에 알아차린 듯했다.
결과는 뭐, 깔끔하게 탈락.
하지만 돈은 벌어야 했고, 내키진 않았지만, 경단녀로서의 필수 코스인 알바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각종 알바를 전전하며 신세 한탄을 하던 중, 첫 직장에서 금요일마다 배낭을 메고 출근하던 친구를 만났다.
식사를 하며 대화가 오가던 중 그 친구가 문득 던진 말
'너 영어 좀 되니까 관광통역사 자격증을 한번 따 봐. 내 친구 중 그 자격증 딴 친구가 있는데, 전국을 여행하며 재미있게 돈 벌더라'
뭐시라?
여행을 하며 돈을 번다고라?
순간, ‘이거다!’ 하는 확신이 번개처럼 스쳤다.
집으로 한걸음에 내달려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에 대한 검색에 들어갔다.
시험은 코앞이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 촉박했다.
꿈의 실현이란,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꿈을 꾸었더니 앞머리만 무성한 기회의 신을 포착하는 심미안이 생겼고, 신의 얼굴은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와 있었다.
이 앞머리를 잡지 못하면 민머리 신의 뒤통수를 보며 또 신세한탄 하겠지.
그래..
남는 게 시간
밑져야 본전
한번 도전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