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면접날, 떨림을 안고 합격의 문을 열었다

새로운 인생으로의 포문을 연 순간

by ANNA

토익 점수를 간신히 턱걸이하며 원서접수를 마친 뒤,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필기시험에 올인해야 했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원 다닐 여력이 없었기에 그때 이어진 공부 습관으로 꾸준히 독학스타일을 유지해 왔던 것이 시험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준비의 첫 단계는 ‘교재 쇼핑’이었고, 기본서부터 기출문제집까지 잔뜩 사들고 나면 왠지 절반은 이미 합격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공부머리는 좀 있는 편이라 조금만 집중해서 기본서를 여러 번 돌리고, 기출문제를 꾸준히 풀기 시작하면 어떤 시험이든 합격권에 들어가는 편이었다.


문제는 ‘면접’
필기시험은 솔직히 큰 걱정이 없었다.
열심히 외워서 네 가지 보기 중 하나만 고르면 되는 시험이었고, 심지어 운이 좋으면 감으로 찍어도 합격할 만한 난이도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내 능력으로 해낼 수 있었지만 면접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유형의 시험을 앞두고 어디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책도 없고, 예상문제도 없고, 지도해 줄 사람도 없는 ‘깜깜이 시험’ 같은 느낌.
그 막막함 앞에서, 나의 자신감도 잠시 멈칫했다.




면접 범위는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 문화, 경제, 정치…
단순히 영어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시험이 아니었다.
특히 역사나 문화 분야로 들어가면 전문용어의 영어로 따로 외워야 하고, 거기에 더해 그 배경지식까지 알고 있어야 그나마 말이 겨우 이어졌다.


기출문제를 찾아보면 더 혼란스러웠다.
질문은 중구난방,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물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늘 독학의 믿는 편이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같은 책을 보면 ‘그래, 결국 책만 파면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학원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도무지 방향을 못 잡겠으니 나만의 고집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

결국 심사숙고 끝에 관광통역사 면접으로 유명하다는 학원에 등록했다.
이미 연초부터 필기부터 면접까지 병행해 온 학원생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뒤늦게 뛰어드는 초짜 수험생 한 명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그들은 이미 ‘준전문가’였다.
첫 수업부터 짝을 지어 면접관과 인터뷰어를 번갈아가며 실습을 하는데, 나는 질문만 들어도 말문이 막혀 그저 어버버… 소리만 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와야겠다.”라고 다짐했지만, 당시 하고 있던 알바를 핑계로 수업을 빠지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뒤늦게 합류해 자주 결석하는 수강생이었지만 프로젝트 조에 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동료들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어학연수 경험이 있고, 관광통역사를 본격적인 직업으로 삼으려는 야망이 넘쳤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보험설계사, 삼성 임원, 영어학원장 등등
각자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이런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같은 시험을 준비한다’는 동지의식으로 묶이며 금세 끈끈해졌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열공한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드디어 면접날이 밝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소복하게 내려 쌓였고, 살을 에이는 듯한 한파가 몰아쳤다.

그래도 ‘관광 안내양 같은 전문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자’는 마음 하나로 머리는 최대한 단정하게 올리고, 정장에 코트를 단단히 여민 뒤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얇게 깔린 눈 위에서 하이힐이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걷는 와중에 긴장감으로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있었다.

대기실에서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르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면접장 문을 열자 세 명의 면접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손끝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긴장감이 밀려왔다.




문제는 총 세 가지였다.


1. “창덕궁 야간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평소에 정리해 두었던 말들이 죄다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창덕궁 관광의 의의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는데,
여자 면접관이 바로 제지했다.
“아니요, 야간 개장에 대해요.”

그때부터는 거의 소설에 가까운 말을 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창덕궁 아름다운 야경으로 인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
라는 요지의 내용을 을 길게 늘여서 설명한,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한 답을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2. “현재 남북이 화해 모드인데, 통일되면 관광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이건 그나마 공부했던 분야라 그동안 갈고닦은 내용을 자신 있게 쏟아냈다.
말문이 막힘없이 술술 나와서 스스로도 기세등등해졌던 문제였다.


3. “삼강오륜에 대해 영어로 설명해 보세요.”
와… 이건 진짜 뒤통수 제대로 때린 질문.
예상문제 리스트에도 없었고, 한국어로도 설명하기 난감한데 그걸 영어로?
고민할 것도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I’m sorry, I don’t know about it”


면접장을 나오는 길은 참담했다.

'에휴, 뭐, 좋은 경험 했다고 치자. 이 나이에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본 게 어디니?'

스스로를 달랠 뿐이었다.




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궁금했다.

토익 점수를 확인하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화장실 변기에 앉아 정각이 될 때까지 새로고침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화면에 뜬 한 줄.

‘합격’

“…어머, 나 진짜 합격한 거야?”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의 권유로 얼떨결에 뛰어든 관광통역사 시험에서 나는 정말로 당당하게 합격하고 말았다.
믿기지도 않고, 기적 같고, 한편으론 ‘나도 해냈다’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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