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을 비웃던 여행자, 결국 프로 한식러가 되다

여행가방이 점점 한식 창고가 되어가기까지

by ANNA

해외여행 인솔자의 일에 들어서기 전, 나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던 ‘찐 여행자’였다.

최대한 현지의 공기를 그대로 들이마시고 싶어서 늘 현지 맛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음식을 먹었고, 그들이 마시는 술과 차, 음료를 함께 즐겼다.

일본에서는 사시미에 사케를 곁들이고, 동남아에서는 음료수보다 저렴한 맥주를 마셨으며, 스페인에서는 타파스에 리오하 와인을,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 돌돌말아 끼안띠 클라시코와 함께 삼켰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슈니첼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고, 독일에서는 소시지에 맥주를, 체코에서는 꼴레뇨에 흑맥주를, 프랑스에서는 스테이크에 부르고뉴 와인을 올렸다.
그래서인지 그 나라를 떠올리면 언제나 풍경보다 먼저 그곳의 음식과 술의 온도가 함께 따라왔다.

패키지 투어를 가본 적도 없고, 자유여행 중 한국인을 거의 만나지 않았기에, 나는 모든 여행자들이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한다고 자연스럽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인 한 분(당시 50대 중반쯤 되었던 아저씨)이 다니던 최고경영자 과정 대학원에서 단체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 계획을 설명해 주는데, 듣다가 정말 경악했던 순간이 있었다.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니 각자 먹거리를 나눠서 가져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너는 소주 스무 팩, 너는 라면 몇 개, 너는 햇반 몇 개, 너는 캔김치랑 밑반찬' 같은 식이었다.

일단 먹거리를 챙겨가는 자체가 이해불가였다.
그리고 순간 대체 저럴 거면 왜 여행을 가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패키지 투어로 직접 인솔을 나가 보니 상황은 더 극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컵라면과 튜브 고추장을 챙겨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그래서 출발 전 안내 문자를 보낼 때마다 유럽 호텔에는 전기포트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따로 준비하시라는 문장을 꼭 넣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주, 햇반, 누룽지, 블럭국, 믹스커피, 김, 김치, 각종 밑반찬, 한국 과자까지.. 마치 여행 가방 하나가 작은 한식 식료품점처럼 채워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스스로를 더 ‘현지에 녹아드는 여행자. 그들보다는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속으로는 괜히 혀를 끌끌 차고 그들을 비웃곤 했었다.




해외 인솔자 일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 스페인을 시작으로 1년 동안 스무 번이 넘는 투어를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그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떠나는, 잠깐 들르는 경유지 같은 시간이 반복되었다.


유럽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내 안에도 조금씩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럽 패키지 투어 일정에는 보통 한두 번의 한식 식사가 포함되는데, 그 시간이 가까워지면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이고 그 순간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막상 한식이 눈앞에 차려지면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한 공기를 순식간에 비워내는 건 물론이고, 반찬 하나까지 남김없이 싹싹 긁어 먹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스페인에 오래 살던 가이드 역시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세비야에 가면 늘 들르던 중국식 바비큐 웍에서는 가이드와 인솔자를 위해 신라면을 따로 끓여주곤 했는데, 그곳은 사실 각종 육해공 산해진미를 무제한으로 구워 먹을 수 있고, 샐러드와 과일, 튀김, 볶음밥, 면류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음식의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같은 순서를 따랐다.
신라면 한 그릇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들이킨 뒤에야, 비로소 고기와 해산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서 신라면을 먹지 못한다는 건, 손발이 묶인 채 며칠을 굶다가 눈앞에서 끓는 라면 냄새만 맡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중반 즈음부터는 내 여행 가방에도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컵라면과 튜브 고추장을 챙기던 수준에서 시작해 점점 그 범위가 넓어졌다.

햇반과 김, 김치가 하나둘 추가되었고, 컵라면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실리콘 쿠커까지 들고 다니며 봉지라면을 끓여 먹기 시작했다.
석식이 부실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날이면, 방 안에서 라면을 끓여 조식 식당에서 슬쩍 챙겨온 삶은 계란과 함께 먹었다.
그 맛은, 그것도 스페인 한복판에서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한식을 챙기는 기술은 점점 정교해졌고, 40일을 버텨야 했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무게를 극도로 줄여야 했기에 라면 대신 라면 스프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 스프에 무게가 가벼운 누룽지를 넣어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파스타면을 구할 수 있을 때면 면을 사서 라면처럼 끓여 먹기도 했다.
마른 미역과 다시다로 미역국을 끓여 먹고, 길가에서 뜯은 민들레에 밀가루와 다시다를 섞어 전을 부쳐 먹던 날들.. 소박해 보이지만 이것은 한국 여행자의 만찬이었다.




단 한번 진행한 이집트 투어의 나일강 크루즈에는 통상 대여섯팀의 한국팀이 타면서 3박 4일 정도를 진행하고, 자연스럽게 인솔자들과 가이드들은 안면을 트고 나이트라이프를 즐기곤 한다.


크루즈에서의 마지막 날

송별파티란 명목으로 크루즈 선상에 모인 인솔자들이 꺼낸 것들은 과히 놀라웠다.

나의 코딱지만한 쿠커는 명함도 내밀 수 없을 정도의 곰솥 사이즈의 쿠커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기본 라면에 각종 한식 레토르트 식품들이 곁들여 졌다.

그들과 나와 다르지 않구나

웃기면서도 슬프고 격하게 공감가는 인솔자들의 현실을 실감했던 날이었다.





귀국식은 늘 김치찌개였다.

공항에서부터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침샘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쨍하게 올라오는 신맛은 버터에 절여진 듯 묵직해진 위를 한 번에 씻어내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김치찌개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으며, 나는 결국 뿌리 깊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해외에서 한식 타령을 하다 보면, 예전에 한식을 싸 들고 다니던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던 시절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이제는 내가 그 세계의 한가운데, 완전히 적응해버린 ‘프로 한식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양보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술이다.
니들은 라면에 레드와인을 곁들여 본 적 있나?

그 묘하게 어긋난 조합의 맛을 니들은 아나?


룸에서 혼술할 현지 술을 저렴하게 구하기 위해, 나는 각 도시의 마트 위치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자유시간만 생기면 그곳으로 향했다.
적어도 내 가방에 아직까지 소주를 넣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반쯤은 여전히 유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반쪽 유러피언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자부해 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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