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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May 20. 2020

30여 년 만에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한 일

바라고 원하는 일이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어요!'


틈새 시간이 생기면 중고서점에 곧잘 간다. 종종 들르는 곳에서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DVD를 발견했다. 가격도 보지 않고 계산대에 내밀었다. 1,900원이라니.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오자 마자 포장지를 신나게 뜯었다.

여섯 살 아들에게는 처음 보는 '옛날 이야기'같은 만화지만, 꼬꼬마 였던 내가 봤던 만화를 30여년만에 내 아이와 함께 본다는 마음에 들뜨기도 했다. 설렘도 잠시, 만화가 시작되었고, 주인공 네로는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 끝에 루벤스의 그림을 마주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 한마디를 하고는, 반려견 파트라슈와 함께 무지개 다리를 건너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아... 마음이 너무 아프면서도, 네로의 마지막 한마디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에게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은 행복함을 주는 것,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바라는 것이 있었나?'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행복, 코로나19 사태에도 특별히 아프지 않고 가족과 지인들이 건강함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내일 죽더라도 한 번은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하는 일들이 지금의 나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지.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바라는 것도 없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도 무엇인지 모른 채로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네로의 행복한 표정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한마디에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함께 나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있다는 자각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아들은 '플란다스의 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후로 며칠째 방 한쪽에 있는 DVD 플레이어가 멈추면 계속 플레이를 눌렀다. 덕분에 나도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다 내 인생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10여 년 전 직업상담사로 입직하고 2~3년 차쯤 되었을 때쯤의 일이다. 내가 참여자로서 인생 로드맵 강의 수강 후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혼자 앉아 최대한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던 메모가 떠올랐다.


 '나는 말과 글로 나 자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겠다'


이런 미션이 나에게도 있었다니. 10여 년간 직업상담사로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매일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말과 글의 힘을 어떻게 키울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실천 노력을 해왔다. 분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하며 애쓴 시간들도, 육아와 이혼소송, 소 취하 후 일상 복귀 노력 등의 일들을 3년여간 마주하며 새카맣게 잊은 것이다. 매일의 피로감과 상실감으로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만 키우면서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고백이 참 아프고, 부끄럽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 이 마음이, 마음만으로 그치지 않도록 어서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한번 더 다짐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남편과 나 모두 3년 전 이혼소송과 함께 실직 후 계약직 근무와 구직자 상태를 오가고 있다. 생계를 위한 단기적 구직활동과 함께 장기적인 '나의 일'찾기를 계속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코로나 사태가 기폭제가 된 듯 급변하고 있는 노동시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장기적인 일, 미취학 자녀를 양육(도와줄 가족 없음)하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탐색과 시도를 해야 한다. 중요한 활동이지만 오늘이나 이번 주 혹은 다음 달에 바로 결과물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성취감을 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다.


'브런치 작가 신청!'


말과 글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언젠가는 나의 책 한 권은 갖고 싶은 로망을 품고 사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브런치는 당연히 애용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한 번씩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공감도 얻었고, 자극을 받기도 하는 공간이다. 작가가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 공간이다. 오랫동안 생각은 했지만 '내가 그 정도는 안되는데'라는 생각에 매번 도전도 하지 않았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르지 않아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신청'을 클릭한다는 자체로, 몇 년 간 나답지 못했던 나에게 나다운 도전과 성취감을 선물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 신청' 클릭 후 2년 만에 거울 앞에 제대로 서서 네로처럼 나에게 따뜻하게 웃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긴장을 잘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던 브런치 작가 신청. 망설임 끝에 클릭했다.

더 잘쓰지 못해 아쉬운 마음, 후련한 마음과 함께 괜히 메일함을 자주 뒤적거렸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오왓! 2020년, 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일이다.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는 것을 듣는 일은 무척 쑥스러웠지만, 간지러운 만큼 듣기 좋고 행복한 일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신 시간 속에서, 나를 살리고 남도 도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 없겠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작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도록, 오래도록, 할 수 있는 한, 나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표지 이미지_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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