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싱크대 바로 아래에는 클릭 잘못해서 구매한 '보통 등급'을 쌀이 쌀통에 가득 들어 있어요. 하지만 '미안함을 담은 김밥'인만큼 몇 발짝 더 걷지만 주방 베란다 하부 수납장 안쪽에 보관하던 '상 등급'쌀을 꺼냈습니다. 영차. 개운하게 씻은 다음 소금을 적당량 넣고 취사를 돌렸습니다. 밥솥이 오래간만에 김초밥 모드 취사를 시작했습니다. 밥이 다 되면 뜨거운 연기가 마구 날 때 새 밥을 떠서 남해 친정 엄마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주걱으로 휘릭 휘릭.
미나리-평상시에는 시금치를 주로 더 많이 사용하는데, 오늘 냉장고에는 미나리만 있어요. 그래도 아직 줄기와 잎이 생생하여 쓸만한 미나리를 끓는 물에 소금 좀 넣고 데쳤습니다. 꺼내어 열기를 찬물로 식히고 물기를 짜낸 다음 소금과 참기름으로 조물조물하였어요. 향도 좋고. 오늘 김밥에 어울리겠어요.
당근. 당근은 초절임 되어 시판용으로 나온 것이 조금 있어 양이 적당할지 고민이 되었어요. 김밥 한 줄에 가느다란 당근 두 세 가닥 넣으면 몇 줄 말아질 것 같았는데, 영 색이 예쁘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생당근을 채 썰어 볶는 것이 저에게는 좀 번거롭게 여겨지는 일이라 망설였지요. 하지만 오늘은 '미안함을 담은 김밥'이므로 생당근을 꺼내어 채 썰고 웍에 넣어 소금 간하여 볶아 냈어요. 당근 양이 아주 많아졌어요. 이미 배가 부른 기분입니다.
어묵. 어묵은 시장 어묵이 맛이 있지만. 그래도 냉동실을 뒤적여 보관된 여러 어묵 중 '삼진 어묵'을 꺼내었어요. 남편은 '삼진어묵'을 좋아하거든요. 길이로 길게 자른 어묵을 웍에서 볶다 간장을 붓습니다. 그 순간 '지글지글 지글' 소리와 '짭조름한 간장 타는 냄새'가 조용한 온 집안에 퍼집니다. 아들은 '엄마, 내가 다 먹어치울 거야. 많이 많이 줘요'하며 접시를 찾아옵니다. 올리고당을 넣고 마무리를 한 후 싱크대 근처에서 서성이는 아들의 접시에 수북이 담아 줍니다. 아들은 그릇을 들고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앉아 싹 비워냅니다. 이래서 어묵은 김밥 속에 들어갈 양 보다 항상 많이 볶게 되네요.
햄. 햄은 종류도 다양한 만큼 사람들 마다 취향이 다르지 싶어요. 남편은 기다란 후랑크소시지를 좋아해서 이번 김밥엔 그 녀석으로 준비했어요.
김. 김은 미리 꺼내 놓으면 눅눅해지니 모든 재료 준비를 마친 후 마지막에 꺼냈습니다. 김밥김도 좋지만 백종원 대표께서 집에 있는 김이면 어느 것이든 괜찮다셨어요.히히. 김치냉장고에서 안 쪽에 보관하던, 시어머니께서 주신 '곱창김'을 꺼냈어요. 그리고 지금은 꿉꿉한 장마기간이니 프라이팬 위에서 '곱창김'을 2장씩 적당히 구워줍니다. 약간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수분을 날려 좀 더 바삭한 김으로 만드는 거죠. 이건 '미안함을 담은 김밥'이니까요!
마지막 재료는. 미안함을 담은 제 손맛. 하하.
모든 재료가 준비되면 김밥을 쌀 때만 사용하는 도마를 꺼내 김밥김을 펼쳐주고 밥을 폅니다. 제 맘대로 재료를 담고 흐트러지지 않게 돌돌 잘 말아 줍니다.
남편은 김밥을 정말 좋아해서 10장 1봉짜리 김을 사서 김밥을 싸면, 한번 에 그 열 줄을 다 먹을 때도 있어요. 얇은 김밥 말고요, 속이 튼실하게 들어간 김밥요. 그렇게 먹고 나면 배불러서 터지겠다면서 바로 뻗어버리죠.
오늘은 '미안함'을 담은 만큼, 그렇게 과식으로 힘들게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속을 꾹꾹 눌러 담아 평소보다 조금 더 튼실한 김밥 4줄을 말았습니다. 말아 놓은 김밥 위에 남해 친정엄마의 참기름을 듬뿍 발라줍니다. 참기름을 바른 칼로 슥슥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깨소금도 솔솔솔솔 뿌려줍니다.
적당한 크기의 접시를 골라 담아주고 랩을 덮습니다. 남편은 아마 제가 외출하고도 한참 지난 후에 일어나서 이 김밥을 먹을 거에요. 요즘 같은 날씨에 상하지 않게 잘 놔두어야 해요. 냉장고에 넣으면 맛이 급격히 떨어지죠. 냉장고에 넣지 않았어요. 주방 베란다의 바깥 창문을 손가락 한마디 정도 열어 적당히 바람이 통하게 하고 해가 들지 않는 방향에 접시를 둡니다.
그리고 남해 친정엄마표 김치를 꺼내어 손으로 찢습니다. 평소엔 칼이나 가위를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손으로 찢어 먹는 맛이 있지요. 오늘은 '미안함'을 담기로 한만큼, 좀 번거롭더라도 손으로 찢은 김치를 접시에 담아냅니다.
'미안함'을 담느라 안 그래도 손이 느린 제 김밥이 말리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 오늘이에요.
김밥을 다 만들고 나니 동생과의 약속시간이 30분 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에휴, 이러고 나면 싱크대 안은 엉망이 되어 있죠. 순간, '외출했다 돌아와서 설거지할까?' 망설였어요.
하지만 '미안함'을 담느라 애쓴 김밥이 싱크대 안의 설거지들 때문에 맛이 반감될까 봐 서둘러 설거지를 했죠. 설거지도 우당탕 끝내고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 다되었어요. 나름 동생 진급 축하 자리 참석 예정인데, 화장할 시간도 안 남아서 그냥 나갔어요. 쌩얼로. 오늘은 김밥에 '미안함'을 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