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상상의 노예가 된다. 그 사람의 말과 표정 모든 것을 해석하려 든다.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다 울고 웃는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깨달았던 밤, 나도 그랬다. 끊임없이 당신이 건넨 말을 떠올렸고, 당신이 보여준 표정을 그렸다.
당신의 모든 것이 내겐 수상하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전혀 수상쩍지 않을 것들이었다. 당신은 내 앞에선 거의 늘 웃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일상적인 행동을 마치 처음 보는 퍼즐 조각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걸 맞추려 했다.
애초에 퍼즐이 아니었으니, 맞춰질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상상의 힘을 빌려 그 조각을 억지로 깎고 잘라 퍼즐을 완성하려 들었다.
바보짓은 한참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의 변화를 찾으려 애썼다. 당신을 굳이 만나거나 연락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바야흐로 21세기. 그래, 좋은 세상이었으니까.
당신이 끄적거린 글 몰래 훔쳐 읽기.
당신이 올린 사진 물끄러미 바라보기.
몇 달, 아니 몇 년 전 당신이 인터넷에 남긴 흔적까지 뒤적거리기.
어쩌면 스토킹이라고 할 만한, 이 모든 병적인 집착이 방 안에서 이뤄졌다. 별 힘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클릭만하면 됐으니까.
딸깍딸깍
또 딸깍딸깍
이렇게 방 안에서 당신을 관찰했으나 완전한 만족을 얻진 못했다. 당신이 공개한 사실 속에서, 정작 중요한 진실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
당신의 글에서 묻어나는 그리움, 그건 나를 향한 그리움일까.
“오늘 좋았다”며 웃고 있는 사진, 그건 나를 만나 좋았다는 얘기일까.
이런 의문을 품은 채 나는 방바닥을 굴러 다녔다.
결국 나는 당신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당신의 눈을 보고 손짓을 관찰하며 말을 나누고, 당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진실에 닿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당신과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신은 내가 그간 알고 지낸 여자들과는 달랐다. 마음의 문을 여는가 싶어 손을 뻗으면, 문은 순식간에 닫혔다. 자신의 옆에 설 것을 요구하다가도 오래 그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확인 받으려 들었다. 이에 응하는 내 말이나 행동이 어설프면 당신은 매섭게 돌아섰다.
한참을 떠들다 손거울을 보는 당신의 무심한 표정을 기억한다. 마치 오늘의 말과 행동을 착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오는 내내 나는 무안함에 치를 떨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그뿐.
나는 금세 마음이 변해, 당신을 좋아하게 된 첫날처럼 상상에 빠져 속으로 웅얼거렸다.
“아까 했던 그 말, 왜 그런 거야?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건 무슨 뜻이지?”
집에 오면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당신을 쫓아다녔다. 혹 나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진 않을까 기대를 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뭐가 올라오더라도 모호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새롭게 던져진 퍼즐 조각과 오늘 당신이 뱉어놓은 퍼즐 조각들을 모아, 나는 잠들기 전까지 열심히 갈고 닦았다. 또 한 번 억지로 맞춰보려고.
오늘, 그날을 되짚으며 몇 개의 단어를 떠올린다.
어장(관리), 짝사랑, 가슴앓이, 나쁜 여자(남자), 희망고문
그리고 바보. 심하게는 X신.
돌이켜보면 다 맞는 말.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이들이 나처럼 지내고 있을 것이다.
혼자 아파하고 좋아하고, 울고 웃고, 상상하고 절망하고, 기대하고 좌절하는
심히 억울한
하지만 상대가 그 사람이어서 억울하지 않은
불균형하고 비대칭적인
非연애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그럴 수 있어요.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나도 그랬고
많이들 그래요.
다 비슷합니다.
오늘은 아프겠지만
내일은 다를 겁니다.
오늘을 통해
적당한 거리
적당한 마음
적당한 끌림
적당한 시선이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이 적당함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을
완성시켜 줄 것을
나는 믿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