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단편소설집_아보카도
침묵 속에서 발견하는 속 깊은 이야기.
말문이 막힌 적이 꽤 있다.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전화가 왔을 때도 그랬고 아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 중요한 대화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과 상황에서 나는 침묵을 선택한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묘한 감정들에 혼란스러우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나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상태, 기쁨과 불안이 공존하는 순간, 사랑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상태에서 여전히 말문이 막힌다. 내 어휘력 부족일지도 모르고 감정의 혼란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말문이 막히는 게 갑자기 바보가 되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주말의 남대문 시장통 같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이나 슬픔 같은 강렬한 감정들은 종종 언어의 틀을 넘어서는 것 같다.
이때는 감정이 말을 압도한다. 바로 침묵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럴 때는 억지로 말로 표현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낫다. 침묵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전달되고, 깊은 이해 또한 말 없는 순간에 일어난다. 때로는 이 '침묵의 순간'을 통해서 오히려 진짜 소통이 뭔지 깨닫기도 한다. 오죽하면 침묵이 웅변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소설 『아보카도』에 나타난 인물들은 '말하지 않음'으로 감정의 깊이를 드러낸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감정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큰 사건이 있어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속마음도 잘 털어놓지 않는다. 필경사 바틀비가 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했듯이 그들도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울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하지 않음'은 나로 하여금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탐색하게 했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잘 들리는 감정들이 있다. 말 없는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진다. 어떤 인물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속이 터져버릴 것 같다. 격렬하게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들은 오히려 감정을 놓아야 할 자리를 몰라 망설이고, 조금씩 천천히 정리해 나간다. 대체로 침묵하거나 회피하고 감정을 묻은 채 살아간다.
그들은 극복보다는 '지속'을 선택하고 무너진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떠난 이의 부재에 울부짖지 않는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없고 그저 여운만을 따라간다. 독자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들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제야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김혜영은 인물들이 끝내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짐작하는 사람. 그 마음이 남은 자리를 오래 응시하는 소설가. 어떤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감정이 남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작가,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힘들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고, "복잡해"라고 하면 너무 애매하고, 그렇다고 긴 설명을 하자니 상대방도 지루해할 것 같고... 그래서 새로운 표현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멘붕... 같은 단어를 사용한 다음 침묵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