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를 죽이는 사람들

"당신은 정말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앵무새 죽이기》가 던지는 불편

by 김설




어린 시절, 나는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남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차별은 나와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착각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착각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착하다고 믿었던 많은 순간에 나는 수많은 ‘앵무새’들을 외면했다. 심지어 그 앵무새들을 죽이는 데 침묵으로 동조해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착한 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고달픈 인생을 사느라 정의라는 거 자체를 잊고 산 누구라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면 깨닫게 될 것이다.


"내 안의 정의는 아직 살아있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인종, 계급, 성별 등 우리가 외면해온 ‘보편적인 고통과 갈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책은 단순한 인종차별 소설이 아니다. 어린 소녀 스카웃의 눈을 통해, 편견과 두려움이 어떻게 사람을, 그리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정의는 누구의 편이어야 하는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앵무새 죽이기』를 관통한다. 시종일관 정의란 목소리가 크거나 힘 있는 자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단호하게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왜 옳은 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차별, 침묵, 편견, 그리고 두려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일상의 감정들이 모여 한 사람을 무너뜨리고, 공동체가 병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앵무새 죽이기』는 어린 주인공 스카웃의 시선을 따라가며, 세상의 불합리함을 처음 목격하는 아이의 감정을 통해 우리 내면의 양심을 일깨운다. 스카웃의 눈으로 본 1930년대 메이컴 마을은,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친숙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썩어가는 편견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불의들. 불의는 공공연히 외면된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1930년대 앨라배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다.

스카웃과 젬 남매는 톰 로빈슨의 재판을 지켜보며 세상의 잔혹함을 마주한다. 아버지 애티커스가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온 마을의 시선이 차가워지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등을 돌린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따로 있었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톰 로빈슨이 유죄 판결을 받는 순간, 아이들은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애티커스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패배할 줄 알면서도 시작하고, 끝까지 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용기다." 아버지 아티커스는,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와 맞서 싸울 용기를 기르는 것이었다.



소설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 있다. 동네 괴물로 불리는 부 래들리.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고, 어른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한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서 부는 아이들을 구해주는 영웅이 된다. 부 래들리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억울한 인물이다. 부 래들리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재단하고 배제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다. 나도 부 래들리가 될 수 있고, 동시에 부 래들리를 괴물로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인간적이다. 책을 읽고 나면 자신에게 질문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진실일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함께 본 영화


1962년 그레고리 팩 주연의 영화는 분명 걸작이다.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 아티커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아버지’ 중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영화는 감동적이고 명료하며 강렬하다. 하지만 동시에, 원작보다 ‘덜 복잡’하다. 영화는 법정 장면에 집중하며, 어른들의 세계를 중심에 둔다. 그에 반해 소설은 아이의 내면, 성장의 상처, 그리고 도덕적 혼란을 더 섬세하게 다룬다. 또한 영화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 바로 스카웃의 목소리다. 소설에서 스카웃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그녀는 질문하고, 의심하고, 분노하며, 좌절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 역시 함께 성장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내밀한 성장의 과정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설은 스카웃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그녀의 내면과 성장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반면 영화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감정의 깊이나 세밀한 심리 묘사가 다소 약화된다. 영화 속 애티커스는 너무 완벽했고, 스카웃은 너무 수동적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인종차별의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 할리우드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 탓인지 이 부분을 상당히 은폐하거나 축소한 느낌이 있다.


애티커스가 스카웃에게 했던 말처럼,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판단하기를 선택한다. 공감하기보다는 정죄하기를 택한다. 《앵무새 죽이기》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앵무새'로 만들고 있는가? 성별로, 나이로, 출신으로, 외모로, 학벌로 사람을 재단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SNS에서 누군가의 실수 하나로 그 사람의 전 인생을 매장하는 모습을 볼 때, 다수의 논리로 소수를 억압하는 장면을 목격할 때, 나는 메이컴 마을의 사람들과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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