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의 힘
우울증으로 힘든 중에도 아이는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흩어진 마음들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친구들이 취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평소보다 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될까? 지금 너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란다. 너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야.
아이의 꿈은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내내 그림을 그리면서 굽어버린 등은 아이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준다. 축구 선수 박지성의 발처럼.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처럼 아이의 손은 변형됐고 손목의 인대는 언제나 늘어나 있고 어깨는 딱딱하게 굳었고 게다가 거북목이다. 그렇게 조금씩 몸이 변해가도 아이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고 매달렸다. 창작의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끝없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실패를 두려워한 건 오히려 나였다.
아이에게 좌절의 시련이 다가올까 봐 두려웠다. 막아줄 수만 있다면 내 온몸을 총알받이로 쓰고 싶었다. 아이의 꿈에게 불신을 품었던 것도 나였다. 허황된 꿈만을 좇는 건 아닌가? 이렇게 내버려 두면 경제적 궁핍에 평생을 시달리게 되지 않을까. 물려줄 재산도 없는 부모가 아이에게 현실성 없는 꿈을 꾸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무책임한 일 아닐까. 이만 꿈을 접게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은 끝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자랑스러웠고 말로는 응원한다면서 불안한 마음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직업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영원히 불행을 예약해 둔 사람으로 인식하고 살았다. 딸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릴 때는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 부모님은 "선생님이 되는 게 어때?" "그렇게 좋으면 그림은 취미로 그리던가." 하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그림 따위를 그리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미로 전락해 버리는 때였다. 화가를 그림쟁이로 부르던 시절을 사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생님이 되지 않은 걸 후회한 적도 많다. 그때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 시간 동안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직업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뿐이었다.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면 인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여전히 아이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고 밤을 새우게 하고 먹는 것도 잊게 만든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생기고 버틸 때까지 버텨보고 싶은 절박함도 느끼는 것 같다. 언제까지나 염원하는 그것을, 아직은 확신하는 그것을, 부모인 내가 얕잡아보지 않기로 했다.
요즘은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는지 크고 작은 보상도 따른다. 외주 작업을 의뢰받고 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그럴듯한 조직에 속하지 못할까 봐 스트레스를 받는다. 친구 누가 취직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 그동안의 작업물을 뒤적거리며 포트폴리오를 점검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짓기라는 자기소개서를 새로 쓰고 이력서를 다시 작성한다. 아이는 백수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아이가 그럴듯한 명함을 내밀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으면 좋겠다. 친구들이 주는 명함에 기가 죽고 쭈구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란다. 돈이나 출세를 헐레벌떡 뒤쫓는 게 아니라 꿈과 삶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란다. 진실로 진실로 말하지만 아침이면 시간에 멱살을 잡혀 억지로 눈을 뜨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보다 자유로운 창작자가 백 배 천 배 멋있다. 아이가 또다시 이력서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김중혁 작가의 말을 읽어줘야겠다.
재능이란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