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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n 06. 2020

누가 봐도 진지병







진지병: 가벼운 농담이나 유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상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한다. 웃자고 하는 말에 과도하게 진지하게 반응해 덤벼드는 것, 상대방은 웃고 즐기자는 측면에서 가벼운 농담을 던졌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까칠하게 받아치거나 정색하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네이버 국어사전)








하루의 대부분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시간을 때운다. 존재의 이유나 가치의 대해 생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극히 철학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일종의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다. 오해할까 봐 미리 밝혀두는 것인데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또 이러고 있네" 하는 생각에서 부리나케 하던 생각을 멈춰버리거나 툭하면 자기반성이나 자책의 샛길로 빠진다. 네버!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토록 부정적으로 일관될 거라면 차라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비판 정신을 가졌던 염세주의 철학자 쇼팬하우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고되고 지루한 학문, 철학에 본격적으로 매진할까 하는 쓸모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뭔가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언제나 뒤따라오는 생각은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 무슨.

대뜸 공부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같은 응원의 댓글은 삼가 주시기 바란다. 당신이 그런 류의 댓글을 적는다면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지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뿐이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토록 매사에 진지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될 때는 읽으면 잔잔하게 웃음이 나거나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을 때다. 주로 가벼운 소재를 이용해서 짤막한 글을 쓰고 그것을 조금씩 모아서 만든 책들인데 그중 좋아하는 작가는 단연 최민석이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진지충이던 나는 책을 대하는 태도도 지나치게 진지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마음 한편에 슬픔 한 덩어리쯤은 남겨주는 책을 좋아했었다. (꼭 과거형으로 쓰고 싶다)



글이라는 건 말이야 적어도 교훈이 담겨 있어야지, 그리고 글의 마지막은 그럴싸한 결론으로 끝맺음을 해야지. 하고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알다시피 나는 문학하고는 관련성이 단 1도 없는 디자인 전공자 아닌가. 그런 이유로 내 글에 큰 기대를 하는 사람도 없고 보시다시피 글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티가 난다.

글을 잘 쓴다 못쓴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내는 능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 글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쓰면 쓸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웃음기는 도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건가요? 진지충인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고민도 하나둘씩 늘어간다. 이 세상에는 나처럼 진지한 사람이 꽤 많이 숨어있다가 조용히 내 글을 읽고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진지함 자체가 우스워서 읽어보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진지함이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인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은 남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욕망의 불길이 거세진다. 예전에는 주로 글에서 마른풀 냄새나 꽃 향기가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좋아했다. 마치 가벼운 깃털이 소리 없이 날아다니다가 내 마음에 조용히 앉는 것 같은 글이다. 요즘도 가끔 그런 글을 만날 때면 작가라는 사람과 직업에 대해 동경을 품었던 청년 시절이 떠오른다. 문체에 대한 나의 선호는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시작되고 서서히 지루해지고는 급기야 뒤돌아서게 된다.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변심을 밥 먹듯 하는 독자다.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매다가 운명처럼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가 좋았다가 어느 날부터는 솔직한 아니 에르노가 좋다가 그녀의 대범함에 조금 질리게 된다. 솜사탕 같은 글이 지겨워져서 마루야마 겐지의 서늘한 칼날 같은 문체와 그의 단호함에 빠졌다가 어딘에서도 위로를 찾지 못한 어느 날 밤엔 섬세하고 예민한 이석원 작가의 글에 빠져 허우적 댔었다.













문체의 방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일상을 글로 풀어내는 기술을 한수작가에게 배우고 싶고 에세이  꼭지 안에  편의 시가 숨어있는 듯한 박연준 작가의 글에는 과연 시인이구나. 하며 감탄한다. 김중혁 작가의 글에서는 솔직함과 유머를 찾아내고는 그의 머릿속에 잠입해 도둑질이라도 해오고 싶다. 최근에는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를 빠짐없이 읽고 있다. 찌그러진 의자에 앉아서 많은 사람의 손때가 묻은 만화책을 읽듯이 낄낄대며 읽는다.

작가란 모름지기 이 정도의 시선은 지녀야 직업란에 작가라고 쓸 수 있는 거구나. 아 나도 이처럼 격하게 웃기고 싶다. 한마디로 웃기고 앉아 있고 싶다.



최민석의 책 (꽈배기의 맛)에 홍상수와 소설 쓰기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홍 감독의 놀라운 점은 현실과 영화를 솜씨 좋게도 은근슬쩍 버무려버린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 속의 인물들 정보가 너무나 현실과 비슷해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헷갈려버린다. 영화 속 주인공이 거의 매번 영화감독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왔다 하면 (북촌방향)의 김의성), 실제로 그 배우는 한동안 연기를 접고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저 형이 엄청 똑똑하거든요"라고 주인공이 말을 하면 실제로 그 배우는 정말 똑똑하고 지적 능력이 출중하다. 이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영화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간다. p 139



실제로 나는 이 부분에서 박장대소를 했는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두어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최민석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백 프로쯤 이해가 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을 좋아하는 팬층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의 팬이 존재할 거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쪽이다. 그래서 그런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항상 긍금증 때문에 보게 되는 경우였다. 왜? 왜 또? 상을? 가만있어보자.... 이쯤 되면 그의 영화에는 내 눈에만 안 보이는 예술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인데 내 이번에는 기필코 찾아내리라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본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피식피식 웃으며 "나 참 이번에도 정말 웃기고 앉아있네"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극장에서 안보길 잘했지" 하고는 여지없이 중간에 잠이 들어 버린다. 하지만 최민석 작가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다른 건 몰라도 현실인지 꿈인지 영화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진짜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데는 홍 감독 만한 사람이 없고 그것이 홍상수 영화의 진수인가 보다 하고 이제는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됐다. 대다수의 사람을 팬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영화에는 분명한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는 정말 훌륭한 예술가 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그토록 염원하는 웃기고 앉아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당분간은 재밌는 글을 쓰려고 재미있다고 소문난 글을 찾아 읽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런저런 노력을 할 것이다. 재미있거나 대수롭지 않게 웃기는 글을 쓰려면 삶 자체가 재밌거나 일상이 시트콤처럼 펼쳐져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글 속에 녹여져서 글을 읽는 이가 나의 성별과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어!?"  "80년생쯤 되는 줄 알았더니 무려 60년대 생이야!!!!" "게다가 웃기고 있네!"  이런 말을 듣고 싶다.

하지만 웃기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또 진지하게 하고 있다. 역시 현실은 냉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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