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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l 27. 2020

휴전 중입니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뒤척이며 잠을 청해 봐도 정신이 더 또렷해지기만 한다. 이럴 바엔 일찍부터 부지런을 떠는 게 낫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본다. 새벽의 고요함은 미뤄왔던 생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어제 읽은 블로그 이웃의 포스팅이 잠겨있던 의식의 자물쇠를 열어버렸다. 행복에 취한 사진들.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누군가에게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내 결혼, 내 남편, 내가 이룬 가정은 완벽하다는 믿음이 확고해 보였다. 나도 그녀처럼 결혼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함께 하면 두 개의 삶이 하나로 보기 좋게 섞여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무려 이십오 년 전 이야기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면 두 사람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버무려져 서로에게 딱 맞는 옷처럼 편안한 시간이 올 거라고 믿었다. 기름과 물처럼 영원히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결혼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우리는 다를 거라는 착각도 했던 것 같다. 싸움은 대부분 섞이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다른 남자를 적당히 이해하고 양보하고 또 이해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결혼을 한 직후에는 타인이 하는.모든 말의 의도를 어떤 식으로든 알아낼 수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 말이 남편이 하는 말이라 더 잘 안다고 여겼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말의 의도를 명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는 어째서 양보할 일만 생기고 이해받는 횟수보다 이해해야 하는 횟수만 늘어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불만을 털어놓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답변만 돌아왔다.



"원래 그런 거야. 하찮은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너만 힘들어."

"여자가 참아야지."


결혼이 원래 그런 거라니. 내 의견은 순식간에 트집이 되어 버리네? 여자가 참아야 한다니.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입을 한대 세게 맞고 터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다. 피를 보더라도 이 더럽고 치사한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 나의 삶도 남편의 삶만큼 소중했고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수많은 싸움을 통해 알게 됐다. 부부의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 나는 실제로 많은 것들을 잃었고 울며 불며 다시 되찾기도 했고 영원히 분실된 것들도 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로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고 이젠 나이가 들어서 싸움에 열의가 조금 사그러 들었을 뿐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무언의 합의하에 잠정적 휴전을 택한 것이다. 예상컨데 이건 누구 한 사람이 죽으면 끝날 전쟁이 될 것이다.












언젠가 결혼 전에 오랫동안 남편 기도를 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런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도를 한다는 사실보다 나를 더 놀랍게 했던 건 소망했던 그 남자를 결국은 만났고 결혼 생활에 크게 만족한다는 말이었다. 기도가 그렇게 효용이 있는 줄 알았다면 열심히 교회를 나갈 걸 하고 말하려다가 당장이라도 교회에 가자고 조를까 봐 그만뒀다. 신을 향해 기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한때 꿈이라는 것을 꿨다. 이젠 이곳에 털어놓기에도 민망해진 그때의 꿈을 적어본다. 지금 적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기록이라도 하면서 아쉬움을 털어보자는 심산이다.


함께 책을 읽으며 그것들로 인해 내면적인 충만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삶의 지혜가 부족한 나보다는 조금 더 현명해서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배를 채우기보다는 머리를 채우는 사람, 잉여의 시간을 쓰는 방법을 아는 사람. 사소한 일에 화내지 않는 사람. 천천히 운전하는 사람.  


남편은 내가 한번 읽어보라고 슬며시 권해준 책을 한 페이지쯤 읽다가 잠이 든다. 원하는 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주로 그의 지팡이가 되었으며 그는 밥상머리에서 항상 머리를 채우기보다는 배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피력했다. 잉여의 시간에는 주로 잠을 자고 사소한 일에 핏대를 올리고 싸우려고 든다. 혈압이 쉽게 오르고 맥박은 겁나게 빠른 편이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면 오금이 저려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운전면허를 가진 기간은 나와 비슷하지만 나는 무사고. 남편은 대형사고 세 번. 자질구레한 접촉 사고는 수없이 많다. 대부분은 속도의 문제였다.


그런 불만을 조심스럽게라도 얘기하면 까다롭고 피곤한 여편네쯤으로 여겨서 절망감에 더욱 괴로워졌다. 이쯤 되면 왜 그런 사람과 결혼했냐고 하겠지만 이 세상엔 함께 오래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면 그 질문에 답이 될까. 물론 답이 안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로또에 맞을 확률로 만나기 힘든 사람일 것이다. 무엇보다 로또에 당첨될 만큼의 대박의 운은 나에게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당첨되기를 꿈꿨으면서 로또를 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는 왜!! 이 난해한 남자를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 꽤 오래전부터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을 청소하고 감자를 몇 개를 깎아서 간장조림을 했다. 주재료가 무엇이든 간장을 베이스로 하는 조림은 설탕이 빠질 수 없다. 설탕을 넣어 보글보글 졸여지는 냄비 안을 들여다보며 단맛과 짠맛에 대해 생각한다. 어울리지 않은 듯하며 어울리는 단짠의 중독성은 대단한다. 삶에서 먹는 즐거움이 빠지면 아무 재미가 없는 남편이 단맛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채우고 사느냐가 중요한 나는 짠맛이다.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이지만 감자조림처럼 그럭저럭 단짠의 맛을 내며 억지로 평화로운 척 살아가고 있다.

내가 지닌 선명한 색깔을 흐릿하게 지우느라 여념이 없던 시절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나의 색깔을 적당히 지워 다른 색들과 조화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한다면 어쩐지 조금은 서글프다.  고유의 색은 어디로 갔고 어디서 되찾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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