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Aug 05. 2020

좋은 며느리 말고 그냥 좋은 사람으로 살래요





그해 추석은 반팔 차림에도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나는 여름 날씨였다.  다른 해에 비하면 이른 추석 명절이었다. 집안일에 서툰 며느리인 나로서는 명절 만으로도 달갑지 않은 일인데 가시지 않은 여름의 열기라니.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있으면 등줄기에 땀이 고이고 옷이 흠뻑 젖는 이유는 태어난 지 6개월이 된 딸이 등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부터 안았다 업었다를 반복한 지가 벌써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났다.


시댁의 좁디좁은 재래식 부엌은 서울 태생인 나에게는 불편하고 힘든 공간이다. 쓸데없이 긴 팔과 다리는 작은 부엌에서 갈 곳을 모르고 매번 허우적대고 있다.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더욱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거나 밀가루가 담겨 있는 양푼을 떨어 뜨려 주방 바닥을 밀가루 천지로 만든다거나 강도 조절을 못하고 손등에 기름을 튀겨 쓰라린 채로 일을 한다.


"아.. 이 집은 왜 이렇게 명절이 거창한 걸까.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꼬부랑 시할머니도  없이  같은 얼굴그저 순하기만  시어머니도  입장에서는 아직 낯이 설고 편하지가 않은데 새벽부터 부쳐대는 부침개의 기름 냄새까지 숨이 콱콱 막힌다. 부엌의 작은 창을 활짝 열어 밖으로 코를 내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봐도 자꾸만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기본적인 전은 네 가지다. 배추전, 동태전, 산적, 동그랑땡. 육전. 한바탕 전 부치기가 끝나면 제사상에 올라가는 강정과 유과까지 직접 만들어야 할 모양이다. 거기다 오는 손님들 손에 들려 보낼 요령으로 만드는 양도 엄청나다. 친정엔 명절 때 집으로 오는 손님도 많지 않지만 뭐든지 간단하게 하는 편이다.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싫어하시는 부모님들은 당신들이 손님으로 남의 집에 가는 것도 손님이 집으로 오는 것도 달갑지 않은 분들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이라서 인사를 가고 오는 명절의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 덕에 나는 힘든지 모르고 명절을 보내왔고 하루 종일 손님 상을 차리는 엄마를 본 적도 없이 자랐다.


아직까지 정정하신 꼬부랑 시할머니는 평생 채식주의자로 사셔서 그런지 몸은 많이 마르셨지만 정신이 맑고 꼿꼿하셨는데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지만 할 말은 끝까지 다하는 노인이셨다. 남이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쁠지 생각하지 않고 말하시는 건 그 시절을 사신 분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매정하게 말을 하신다.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고 손해를 보는 것보다는 당장 듣기는 거북하더라도 말을 해버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고 뒤탈을 없애는 차원에서라면 남들이 듣기 싫은 말도 헤야 할 때가 있고 누군가가 총대를 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신혼 초. 총대를 서슴지 않고 매고는 앞장서기 좋아하는 시할머니의 생신 날이었다. 아마도 철부지 딸을 맡긴 친정 엄마 입장에서는  끝내 모른 채 할 수 없던 시할머니의 생신이었을 것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나름은 거액을 들여 선물로 사드린 옷을 받으시고는 대놓고 보란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난 이거 마음에 안 든다. 바꿔 다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고 그다음에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했었다. 바꿔 드린다고 말씀드리고는 친정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물건을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당신 할머니 대단하셔, 손주 며느리의 친정 엄마가 멀리서 보내신 선물인데 좋은 척하며 그냥 고맙다고 하셔야 하는 거 아냐?"

"그걸 굳이 바꿔 오라고 하셔야 돼?"



내 말에 남편의 대답은 더욱 서운했다.

"마음에 안 드는걸 안 든다고 말하는 게 잘못이냐?"



그런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두신 나의 시어머니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착하고 순하기만 하신 분이라 평생 그 시어머니 밑에서 기를 못 펴고 시집살이를 하고 계셨다.

전을 부치기 시작한 지 얼추 다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등에 매달려 있던 아이는 본격적으로 보채기 시작했다. 아들만 다섯인 집에 둘째 아들인 남편이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으니 나는 아직까지는 이 집의 유일한 며느리다. 이럴 땐 두 어른 중 누구라도 "애부터 달래거라." 하고 말씀해 주시길 기다렸지만 두 분 모두  끝내 그 말씀은 안 하셨다. 총대 매기를 좋아하시는 시할머니도 아무 말이 없으셨고 시어머니의 기에 눌러사는 나의 시어머니 역시 아무 말이 없으셨다.



"대체 이 집은 왜 이렇게까지 제사를 모셔야 하는 건가."

"조상을 이렇게 끔찍이 섬기는데 자식들은 왜 이 모양인가."


별의별 저주의 말들이 내 안에서 터져 나오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으려고 하니 자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나도 모르게 입이 씰룩씰룩했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친구를 만난다고 나가서 소식이 없다. 딸과 나를 아직은 낯설기만 한 이 집에 덩그러니 내려놓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도의 노동을 하게 만들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실 내가 화가 났던 건 일이 힘들어서도 두 노인네가 미워서도 아니었다.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난 이 남자와 어쩌자고 결혼을 했을까. 그런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그냥 딱 죽고만 싶었다. 소작농의 아들... 다섯 아들 중 가장 똑똑해서 서울로 유학을 왔던 남자. 시골 태생의 이 남자는 어쩔 수 없는 태생의 한계를 서슴지 않고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농한기가 되면 지금은 해외여행도 가고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모양이지만 옛날엔 시골의 길고 지루한 겨울. 시간 때우기는 술 한 잔을 거나하게 걸치고 고스톱 판을 벌여 내기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것 같았다. 유독 남편이 자란 동네만 유난스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아버지도 친구 아버지도 또 옆집 아저씨도 삼촌도 다 고스톱 판을 벌이니까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게 되었는지 남편은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면  마누라와 딸을 내려놓고는 고스톱 놀음을 하러 갔다. 자신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게 된다는 핑계를 댔다.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 본인이 즐기고 있었다. 가만 보아하니 하면 할수록 판돈은 커지고 있었다. 그 한심한 짓거리를 다섯 시간째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할머니, 아기는 이렇게 쉬지 않고 울고 있는데 애 아빠는 지금 돈내기 고스톱을 하고 있어요."

"저는 그게 화가 나네요. 이럴 때 아기를 봐주면 얼마나 좋아요.."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 그건 봐줘야지 잔소리하면 못쓴다."


시할머니의 말에 가슴속에 잠겨있던 분노가 폭발을 했다. 한번 울면 어지간히 달래지 않고는 눈물을 그치지 않는 딸은 울다가 목이 쉬고 있었다. 조용해서 돌아보니 등 뒤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앞으로 사는 일이 암담했고 당장 친정으로 가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되감기를 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볼세라 몰래몰래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물을 다듬고 쌀을 씻어서 불려 놓았다. 저 많은 쌀을 방앗간에 가서 가루로 만들어 오면 몇 시간을 꼬박 앉아 송편을 만들어야 한다.

방앗간을 가기 직전에 돈이라도 땄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마당을 들어서는 남편의 얼굴에 들고 있던 스텐 뒤집개를 냅다 던졌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느닷없는 내 행동에 놀란 사람들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 길로 집을 나왔다. 저지른 일이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기랑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나의 엄마가 계신 나의 집으로 가자."











나의 시집 살이 인생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평화롭던 어느 날. 사람 좋은 시어머니가 강정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의 일들은 모두 흘러간 과거사가 되었다. 남편의 다섯 형제는 모두 결혼을 했고 다섯 명의 며느리가 각자의 집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해가지고 간소하게 명절을 지낸다. 이젠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긴 세월이 흘렀다.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 주지는 못하셨지만 힘들 때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손을 잡아주시던 시어머니가 지금 많이 편찮으시다. 나에게 시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섭지도 불편하지 않았다. 부스러질 듯 앙상한 어깨를 보고 있으면 결혼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고 며느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셨던 분이었다. 유독 내기를 좋아하고 승부욕이 미치도록 강한 남편 때문에 그 후로도 족히 10년은 마음고생을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남편과 티격태격 잘(?) 살고 있다. 다 옛날 얘기다. 지나간 아픔을 흐리게 만들고 추억으로까지 둔갑시켰으니 시간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입만 열면 과거 이야기고 글만 썼다 하면 옛날이야기 인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 든 사람이다. 장마가 끝나면 가장 좋은 깨를 사다가 강정을 만들어 시어머니께 다녀와야겠다. 나는 절대 효부는 못될 사람이고 적어도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휴전 중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