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새의 선물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는 카페가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원두로 카페라테를 만들어주는 곳이에요. 물론 내 기준이지요. 카페 라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마시는 라테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들 할 거예요. 만약에 그런 카페 라테를 찾지 못했다면 조금은 불행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테를 찾아다니고 있을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나는 운이 좋게도 바로 집 앞의 카페에서 그런 라테를 만났어요. 눈이 오면 내리는 눈을 어깨에 얹고 비가 오면 빗방울이 보이는 투명한 비닐우산을 쓰고 그곳에 가요. 나는 그 카페의 부지런한 첫 손님이자 단골입니다. 들릴 듯 말 듯 음악이 깔리고 버터가 잔뜩 발린 빵이 구워지고 있다는 건 냄새를 맡아보면 명백히 알 수 있어요. 거기에 커피 향까지... 반백수의 이런 아침,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나요?
카페에 들어가며 눈인사를 하면 커피 바에 서있던 바리스타는 자연스럽게 라테를 준비하기 시작해요. 원두가 갈리고 우유 거품기가 돌아가면 나는 속엣말을 합니다. 우유 거품이여 제발 쫀쫀.... 쫀쫀해져라....
아침 8시입니다. 그 시간에 문을 열거든요. 나는 거의 백 프로 아니 99 프로 혼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페를 중심으로 사방이 아파트 단지고 그 옆에는 병설 유치원이 딸려있는 초등학교가 있는 주택가의 자그마한 카페니까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바쁜 아침에 카페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는 건 그래서 나뿐입니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흘끗 쳐다봅니다. 저 늙은 아줌마는 일찍도 나왔네. 하는 표정이네요.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서 한 무리의 펭귄들이 나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발목만 내놓은 검은색 롱 패딩 차림으로 동동거리며 걸어옵니다. 자기 몸만 한 가방을 업은 꼬맹이들과 엄마 손을 잡은 유치원생들. 언니나 오빠와 함께 등교하는 아이들, 건널목엔 녹색 어머니회 엄마들이 아이들을 챙기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녹색 어머니회는 여전하네요. 오래전에 해본 적이 있어요. 초록색 앞치마를 입고 횡단보도에 1시간을 서있었던가...
드디어 쫀쫀한 거품이 올라간 라테가 완성되었다고 진동벨이 울려요. 입 주변에 거품이 묻는 걸 걱정하지 않고 뜨거운 카페라테를 홀짝거리다가 두 번째 손님이 들어온 걸 뒤늦게 알게 됐네요. 아이는 팅커벨이 그려진 보라색 가방을 메고 있지만 가야 할 곳이 학교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그 애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의 발 밑에는 바퀴가 달린 캐리어 하나와 작은 여행 가방이 있어요. 이른 아침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려나? 그 순간 아이가 벌떡 일어나 빨대를 모아둔 코너에서 냅킨을 챙겨 엄마에게 건네요. 참 다정한 아이구나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아이가 건넨 냅킨으로 여자는 연신 눈가를 찍어내고 있어요. 나는 비스듬히 앉아있는 아이의 옆얼굴을 안 보는 척하며 봤어요. 아이의 눈빛에도 공허는 깃들어요. 나는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죠. 우는 엄마를 달래며 크는 아이의 마음이 어떤 건지. 슬픔으로 가득 찬 엄마의 손이 얼마나 차가운 지도. 그러나 이른 아침과 여행 가방 그리고 우는 엄마와 딸이 건네는 냅킨으로 모녀의 불행 따위를 짐작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아이들이 그렇듯 불안이 심했어요. 놀러 갈 건수가 생겨도 집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증세는 없어지지 않아서 친구와 약속을 잡아 놓고 앞 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해서 집에 눌러앉은 적이 있을 정도예요. 내가 밖에 있는 동안 집이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엄마가 집을 나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시달려서 대문 앞에 도착할 쯤이면 기진맥진해지고 엄마를 부르며 뛰어 들어가는 게 망설여지는 아이였어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 집안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는 법을 배웠고요 그럼으로써 조금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므로 나의 귀가 불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고요.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맞이하며 목욕을 하게 해주고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이고 가정이다.라고 일본의 작가 소노 아이코가 말했는데요. 나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요. 가정과 부모가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을 지나 가정과 부모가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곳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도 그 단어 앞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나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태어나 선택하지 않은 가정에 편입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가파른 산동네를 엄마와 함께 오르고 있었어요, 엄마의 등엔 태어난 지 일 년쯤 된 동생이 업혀 있었고 색 바랜 파란 나무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울지 않는 건 나뿐이었죠. 얼마 전 문간 방에 세든 남자와 엄마 등에 업혀 있는 남동생의 얼굴이 어쩌면 이렇게 닮았냐며 깜짝 놀라는 주인 할머니의 말이 아빠의 두 집 살림의 증거라는 걸 나는 다섯 살 무렵에 알게 되었어요. 올라갔던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쓸쓸하고 초라한 산동네의 저녁 풍경을 보며 세상살이는 이런 것이려니... 결혼이라는 것도 이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면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어린애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하겠죠. 하지만 아이들은 많은 걸 알아요. 어른들이 믿지 못할 만큼 아는 게 많아요. 그렇게 나는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조금은 뻔뻔했고 때로는 교활함을 익혔으며 냉소를 자랑처럼 여기며 속물스럽게 변한 어른이 되었어요. 그게 삶이고 지혜라고 여기며 건강한 생활인이 되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고 또다시 가정이 만들어지고 부모가 되었고요. 아이가 울면 덮어놓고 사탕을 주고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무섭고 냉정한 얼굴로 돌변하는, 내 엄마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엄마가 바로 나라는 사람.
이 나이 쯤 되면 내가 나를 알 법도 하고 나아가 남의 속도 알만 한데 어째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겠고 남도 모르겠는지, 그거 살아간다는 것이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유형검사 같은 걸 계속해서 하는 이유도 아마 자신을 알고 싶은 마음과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찾고 싶은 이유일 거예요.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을 미리 알아두고 경계하고 조심하려는 마음일 수도 있겠고요. 어쨌거나 같은 이유로 아프고 비슷한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같은 병으로 나보다 먼저 입원실에 누워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할 거예요.
수희 님. 나는 얼마 전까지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이미 판가름 난 건 아닌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우스운 꼴이 된 게 이제야 분명하게 인식되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딘가? 하는 하나마나 한 질문이 눈을 찌르는 기분이었어요.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 이제는 피할 수 없이 가까이에 와버린 질병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같은 걸 계속 계속 생각했어요. 같은 출발점에서 뛰기 시작했지만 도착점이 완전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한 후회와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까지. 그야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인생이란 건 대부분 형편없이 초라하고 덧없고 쓸쓸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고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인생의 맛은 각자의 인생마다 고유의 색과 맛과 향이 있고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뒤섞여 있는 상자와도 같으니. 어떤 카드를 뽑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고 절대적인 성공도 완벽한 실패도 없다!!
이번 편지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읽고 쓰자고 다짐했어요. 2주 동안 어떤 책이 좋을까 골똘히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소설을 통해 인생의 불합리를 학습하는 마음으로 읽었다면 이제는 좀 수긍하는 마음으로 읽어내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책을 찾고 찾았죠. 하하... 역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죠.
원래 그런 이야기의 필요성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잖아요. 아마 10년 뒤쯤 죽음을 앞두고 또 번 읽게 될지도 모를 이야기가 바로 은희경 작가의 첫 장편 소설 [새의 선물]이에요.
십 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의 화자인 진희는 이번에도 나와 비슷한 병으로 아파하는 병실 동료 같았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향해 조소를 보낼 줄 아는 12살 진희는 자신이 철이 들어서 더는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조숙한 아이인데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아직 어린아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요. 진희는 어른들의 삶의 이면을 끊임없이 관찰해요. 그런데 그 통찰력이 대단하고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얼마나 입체적인지 400 페이지를 두 번째 읽으면서도 지루함이 뭔지도 모르고 단숨에 읽었어요. 이 책은 1995년에 출간되었고 다음 달이면 무려 100쇄를 찍는 책이라서요. (100쇄!!!!!!!!!!!!!) 남들이 읽지 않는 책을 소개하려는 이 책 읽어보셨어요? 의 취지와는 조금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시다시피 책이라는 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기도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다른 책을 읽느라 [새의 선물]을 놓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나 유명한 책이고 따라서 책에 관한 저자의 인터뷰도 많아요.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새의 선물이라는 제목이 언뜻 내용과 연결이 안 돼서 의문으로 남았었는데요. 지금은 포털에 검색을 하면 간단하게 확인할 수도 있으니 자세한 스토리와 어설픈 감상은 덧붙이지 않으려고요.
사실은요. 어제 은희경 작가를 검색하다가 새의 선물에 관한 후기를 우연히 읽었는데요. 읽고 난 뒤 질려 버렸어요. 나도 그런 글을 쓰게 될까 봐 걱정도 됐고요. 왜 그런 글 있잖아요. 교과서에 실린 소설의 지문을 파헤쳐서 설명하는 글이요. 글의 구조가 액자식이라는 둥, 인식의 범위가 어떠하다는 둥, 그걸 알지 못하면 소설은 잘못 읽게 되는 것처럼 단정 짓는 글이요.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인 나는 회초리를 맞을까 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고 손들고 벌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 편지는 이 정도로 얼렁뚱땅 끝냅니다.
그럼 안녕
2022. 2. 10
김설
덧. 엄마에게 냅킨을 건네주던 공허한 눈빛의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행복이란 인생의 어느 하루뿐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하루가 모이고 쌓이기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