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성석제
수희 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오랜만이에요! 하고 인사하기에는 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느낌이에요. 얼굴도 잊어버릴 만큼.
나는 이런저런, 다사다난한 8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 년치 일을 한꺼번에 다 하고 9월부터는 진짜 팽팽 놀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해 보지만 책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8월 들어 딸아이가 살 방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지만 비가 억수같이 오고 분당의 서현역도 잠겼다고 하고 급기야는 직장이 있는 판교마저 군데군데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렸고요 재택근무에 돌입했어요. 반지하에 살던 사람이 물에 잠겨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고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그냥 기분이 푹 가라앉더라고요, 반지하에 살던 기억도 나고요. 그렇게 시작된 우울감은 단번에 떨쳐내기가 어렵더군요, 부동산 사무실을 돌아보고 집의 실물을 구경하는 걸 미루고 인터넷으로 이방 저 방을 구경하며 우울함을 달랬어요. 그러는 동안 마음은 서서히 이사 준비에 돌입. 들뜬 건지 심난한 건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방바닥에 눕기만 하면 상상으로 이삿짐을 싸고 있었어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요. 나는 버리기 대장입니다. 도무지 아까운 물건이 없고 못 버릴 게 없어요. 버리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버릴 물건들을 커다란 비닐봉지에 모을 때면 신바람이 난 광대 같대요. 춤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가장 먼저 책상 서랍 속에 있는 자질구레한 물건을 버리고 오래된 속옷도 모조리 버리고 타월도 마찬가지로 새것으로 사서 보내야겠다며 구매할 품목을 하나 둘 적어 놓았어요. 난생처음 자식을 독립시키다 보니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가? 싶었지요. 부엌살림이며 옷가지들을 박스에 담고 용달에 싣는 것까지 시뮬레이션을 해보니까 이건 짐이 보통 많은 게 아니더라고요. 한 사람이 나가는 자리에 생길 커다란 공간에 생각이 닿으니 외로움인지 서글픔인지 허무함인지 모를 감정이 들어오더군요.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나고 이 풍진 세상 아등바등 살아서 뭐하나 싶고 책, 3천 부를 팔아도 직장인 한 달 월급이나 될까 말까 한 돈을 받으며 글은 죽어라 쓰면 뭐하나 싶고 만사가 귀찮고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진 거예요. 네, 뭐,,, 솔직히 평소에도 사는 게 별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편은 아니지만
장대 같이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던 며칠 전 답답한 마음에 우산을 들고 아파트 일층에 나가봤어요.
제습 때문에 24시간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을 피해보자는 마음도 있었고요. 우울한 마음을 떨치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일층에 내려가니 같은 동에 사는 SBS 영화배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물론 진짜 영화배우는 아니고 자칭 영화배우예요, 어쩌다 보니 통성명을 하고 조금 친해진 남자분입니다. 자폐는 아닌 것 같고 발달이 약간 늦은 정도의 어른이에요. 본인의 말로는 나이 37세 직업은 에스비에스 텔런트도 아니고 굳이 영화배우. 아직도 어린아이의 눈빛을 가진 사람, 타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에요, 그분은 화장을 한 나와 하지 않은 나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화장을 한 날 우연히 만나면 친절이 좀 과하다 싶고요 화장을 안 한 날은 깍뜻하게 어른으로 대해줘요. 담배를 왜 이렇게 많이 피우세요? 집에서 뭐하고 노세요? 무슨 일 하세요? 저는 백수예요. 아! 나랑 같으시네요? 그런가요? 하하하 식사는 하셨어요? 사람들은 왜 내 인사를 안받아 줄까요? 글쎄요. 아마 바빠서 그럴거에요. 우린 백수지만 다들 일을 하니까요. 아, 그렇지.....
그 분과는 주로 그렇게 시답잖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데요. 정말 이상하죠? 어쩐지 우울했던 마음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았어요. 학교 다닐 때 옆자리에 앉았던, 지지리 공부를 못했던 짝꿍 같기도 하고 여름 방학이면 엄마의 고향 바닷가 마을 기찻길 옆에서 여름 땡볕에 뜨겁게 달궈진 돌을 함께 주워 모으던 코찔찔이 남자애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우리의 대화는 내용도 없고 시시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뎁혀지는 기분이 들어요.
수희 님 저는 가끔 이유 없는 외로움이 밀려올 때면 찾아 읽는 책이 있어요, 바로 성석제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인데요. 엄마가 그리울 때나 엄마가 쓰던 사투리가 듣고 싶을 때, 어린 시절 친구가 생각날 때, 내가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심술을 부려도 저게 또 왜 저러나... 몹쓸 병이 도졌나 보네..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끝까지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할 때면 성석제의 소설을 읽어요.
아. 그리고 웃고 싶을 때도 읽어요. 주인공의 하는 짓이 하도 실없어서 웃고 사투리가 실감 나서 웃고 모자라서 웃고 넘쳐서 웃고 기막혀서 웃고.... 심지어 성석제 소설가는 자기가 쓰고 자기가 읽고 자기가 웃는대요. 읽다 보면 자기가 쓴 소설에 자기가 빠진 대요. 누가 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썼는가 감탄도 한대요. 그러나 그런 소설을 어떤 이유로 썼는가는 기억에 없대요 그러면서도 기억력이 거의 없는 자신의 상태가 하나도 심각하지 않고 뭐 어때? 좋으면 좋은 거지. 내가 신이 나야 읽는 남도 신나는 거지!라고 생각한답니다. 나는 그런 성석제 님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읽으며 낄낄 웃다가 결국 눈물을 찔끔찔끔 짜요,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슬프고 우울했던 감정이 싹 사라지고 없어요. 성석제의 소설을 읽으면 착하고 순한 사람과 대화를 한 기분이 들어요, 비 오는 날 에스비에스 영화배우랑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정화된 것처럼요. 소설의 제목처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아니지만 마음에 몽실몽실 뭔가가 차오르는 것 같아요.
수희 님 더운 여름이니 바쁜 일을 좀 내려 놓으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그럼 곧 만나요!
2022. 8. 16
마음이 몽글몽글한 김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