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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Aug 02. 2022

기쁘게 좌절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안녕하세요, 설님. 이번 주에도 제 편지는 늦었습니다. 이러면 저는 결국 3주에 한 통의 편지를 쓰게 되는 것인데, 3주에 한 통, 그것도 크게 공들이지도 않은 한 통을 쓰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 걸까요? 저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마감을 지키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에게 마감은 영감이고 원동력이며 한계이자 자유입니다. 프로에게 마감은 신 같은 것입니다. 으스대려는 것이 아니라, 저는 돈을 받고 글을 쓰고 책을 파는 사람이기에 더는 아마추어라고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제 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래서야 프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편지를 쓸 때만큼은, 저는 아마추어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설님, 프로와 아마추어의 또 하나의 차이는 노동과 영감을 구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감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물론 영감은 종이와 펜처럼, 제 노트북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영감이라는 것을 그럭저럭 볼 만한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와 집념과 끈기와 투지 비슷한 것이, 그러니까 노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감은 그런 노동을 가능케 하지요.


바쁘다, 아프다 자랑이야말로 정말이지 꼴사납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꼴사납게도 저는 계속해서 바쁜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파도 위에서 여유로운 표정의 선장처럼, 바쁜 와중에서도 여유를 찾고 싶어요. 아무튼 그런 조급함 때문에 영감과 노동 사이의 고리가 좀처럼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간  번이고 써야지, 이렇게 써볼까, 저렇게 써볼까, 하고 마음을 잡고 앉아 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이게 맞는 걸까?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설님은  편지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 하시지만,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런 편지를 누가 읽나하는 마음이라서(누누말씀드리지만 저도 남의 연재글을   읽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연재해도  읽을 ),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진심입니다.


다만, 내가 쓰는 글이 나 자신도 읽고 싶어 모니터를 향해 달려들 만한 글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늘 충분히 고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부분에서 제 마음의 조급함은 늘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이 책 편지 교환의 모티브가 된 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를 제 노트북 곁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가벼우면서 진지하고, 예리하면서 유머러스한, 한마디로 여유가 느껴지는 이런 이야기를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 부족한 재능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평론가들이 열광적으로 논평한 대부분의 책들은 몇 달 동안 먼지가 쌓인 채 서가에 꽂혀 있다가 결국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리는 반면, 미처 평가도 받지 못하고, 토론이나 추천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문득 나는 이런 책들에 관심을 쏟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리뷰를 써보겠노라 결심했었다. 각각의 작품들을 문예사조에 따라 분류하고, 책의 성격이나 경향을 규정하고, 이 책이 다른 책보다 나은지 못한지 독자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리뷰를 쓸 줄 모른다는 걸, 게다가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란 내게 때로는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느긋하고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설님. 세상에 좌절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글쓰기에 있어서만은 저는 좌절을 즐기는 편입니다. 근거 없이 자신감이 차오르고, ‘나처럼 쓰는 사람은 없어’ 하고 자만할 때보다는, ‘아, 역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좌절할 때, 그러니까 깊은 수영장의 바닥을 칠 때, 그때 제게는 솟구쳐 오를 힘이 생깁니다. 더 해보고 싶어집니다. 더 잘하고 싶습니다. 잘할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해보고 싶습니다.


잘할 수 없을지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제 글쓰기의 가장 큰 원동력 두 가지 중 하나일 거예요.(나머지 하나는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기쁨’이겠지요.) 그 마음이 없다면 이런 일은 하고 싶지조차 않을 겁니다. 이 나이가 되어도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마음이 제 것이 된 후로부터, 언제나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히던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제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음표를 띄고 있지만, 그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저는 아이유가 노랫말에서 말한 대로,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진심으로 전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내가 구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호모 루덴스는 춤추고, 노래하고, 의미 있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포즈를 취하고, 옷을 차려입고, 식도락을 즐기고, 정교한 예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유희들이 가진 중요성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즐거움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상상도 못할 만큼 단조로워질 것이며, 동시에 대부분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놀이들은 대개 공동체적 활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집단적인 훈련의 조짐이 가미되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책을 갖고 노는 호모 루덴스는 자유롭다. 적어도 주어진 자유를 가능한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호기심에 부합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적인 책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시시한 책들도 얼마든지 고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거기서도 뭔가를 배우게 된다. 어떤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않아도 되고, 또 원한다면 어떤 책은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도 있고, 어떤 대목에서는 평생 동안 기억하게 될 문장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테뉴가 주장한 것처럼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쁜 동안에도, 제 마음 속은 갖가지 즐거운 일들에 대한 계획으로 가득합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는 설님의 글을 읽고, 앗, 나도 그런데! 시시콜콜 이야기당이라도 만들어 볼까? 라는 생각도 하고, 다음에 또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하게 된다면 그런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 싶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봉부아님과 또 재미있는 일을 벌여봐도 좋을 것 같고, 그런데 내가 지금 이걸 할 시간이 있나... 하면서 정신 차려, 하고 제 머리를 쥐어박기도 합니다.


아무튼 조만간에 봉부아님과 셋이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며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눠 보아요. 그럼 무더위와 습기를 잘 이겨내시길 바라겠습니다.


2022년 8월 2일

의심이 많은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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