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S | Constant Now
요컨대 나르시시즘적 '도덕'을 이루는 모든 것이 자기 정체화에서 하나로 묶인다. 자신의 사회성에 대한 부정, 자아의 무제한적 자기 정립, 보편 범주의 거부. 그리고 동시에 그 귀결인 모순,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에 동반하는 사회적 인정의 필요성까지.
-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이다. 이타적 희생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타적 희생에서도 우리는 만족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익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궁극적으로 사익을 증진하지 않는 행동이란 없다.
-110p
요컨대 유일무이함은 하나의 신화다. 경쟁이 고유 가치 속에서 사라지는 신화. 경쟁을 지탱하는 역설적 신화. 경쟁의 저편이라는 신화,
-146p
각자의 고유한 '개성', '취향', '차이'가 콘텐츠가 되고 자본이 되는 시대다.
문제는 그 목적이 아무리 나다움을 위한 길, 또는 성장에 있다 할지라도 사회의 인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인정을 필요로 하는 한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는 나르시시즘 이데올로기의 역설이자 이중의 고통이다.
자아이상의 실현과 사회적 수용,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할 수 있길 원하지만 어째 노력하면 할수록 힘에 부친다.
원하면 원할수록 빠져든다. 경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다름을 추구했던 나의 나르시시즘과 너의 나르시시즘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개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으로만 보였던 것이 실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 경쟁을 끝낼 수 있는 길, 나르시시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책에서는 '나르시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막다른 골목임을 확인하는 것'말고는 도리가 없다-뾰족한 수가 없다-며
암울한 결론을 내리지만,
나는 다른 시각에서 나르시시즘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 나르시시즘('자기애'의 의미에서)은 누구나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아에 대한 '이상'을 추구하며, 스스로 과제를 부여하는 이유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본래 지니고 있어서다.
할 수 없는걸 열망하는 게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한한 잠재력을 부여받지 못한 이는 없다.
잠재력은 곧 우리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잠재력이 어떻게 발현되느냐가 다를 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공통된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별적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모두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나가길 원하는데, 그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가 각각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하며,
점점 열망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자신이 기대했던 시기에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경험하면서.
여기서 우리에게 내재된 나르시시즘이 고통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첫 번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상을 실현해가는 그 과정, 곧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존중하는 것.
실제로 과정은 그 자체로 결말인데, 왜 어떤 결말은 더 중요하고, 어떤 결말은 덜 중요한가?
판단의 작동으로 나르시시즘을 굳이 좌절시킬 필요가 없다.
진정한 자기애는 모든 과정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해답은,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은 나르시시즘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감정의 뿌리를 살펴보면 모든 부정적 감정은 분리감에서 기인하며,
긍정적 감정은 일체감에서 기인한다.
나는 나로서 인정받길 원하고, 너 역시 너로서 인정받길 원한다.
외적인 조건이 다를 뿐, 내적 차원에서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계속하여 보여지는 것에 함몰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재적 차원을 바라보아야만
나르시시즘의 (분리된) 고통에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해답을 찾아갈 것이다.
나의 나르시시즘은 계속하여 해답을 원하기에.
>>>
♬dEUS | Constant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