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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은 무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공성은 고유한 실체의 공성을 의미하고, 필연적인 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의존과 상호의존은 모든 사물의 본성이다.
-텐진 갸초,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보리심을 일으키려면 다른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자비롭게 소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중생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책임을 내가 떠맡겠다는 깊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202p
우리 마음에서 번뇌를 제거하지 못했다면 일상에서 느끼는 친밀감은 반드시 미혹과 집착에 근거를 둔 것이다. 집착에 근거를 둔 친밀감은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205p
나는 하나이지만 남은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어느 쪽의 요구가 더 큰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207p
반야심경의 핵심은 '無',
없다, 없다,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체가 없다는 게 아니다.
'독립된' 실체가 없다,
즉, 외따로 존재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현상이, 우리의 삶이 다 각각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남을 공감하고자 애쓰지도,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 보리심을 일으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연결되어 있는 공통된 속성이 없다면, 애쓴다 한들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자비를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왜 중요한가?
그래야 진정한 행복이 흘러들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공성을 아는 게 보살이 되는 데 있어 핵심 요소라 한다면,
이는 곧 보살이 되어야 행복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기도 할 터.
세상을 사는 누구나 행복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 불행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게 보살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보살이 되지 않아야 할 까닭은 무어란 말인가?
오히려 '보살'이라는 이름이 주는 초월적인 느낌과 '신'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보살이 되는 것, 혹은 '나의 신성을 깨우는 것'을 너무 높디높은 이상이라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이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하기 때문에, 공성이 필요하다.
따지지 말고, 따지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냥 0이면 된다.
여기저기서 외부의 목소리가 우리의 안을 침투하려 할지라도,
나는 본래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은 완전한 0이라는 인식을 놓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0이고, 당신도 0이다.
우리는 하나일 때 완전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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