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로 지금, '당신은 알아차리고 있는가?'

♬이바디 | 끝나지 않은 이야기

by 로제

알아차림은 전적으로 모든 것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알아차림은 모든 것에 있는 그대로의 자유를 허용한다.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이 곧 우리 자신이자 세상 자체인 알아차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무엇도 우리와 겨룰 수 없다는 뜻이다.

-론다 번, '위대한 시크릿'



그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짜증 난 적이 있다면 그 짜증은 이미 당신 안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이다. 내면에 이미 억압된 짜증이 없다면 무엇에 대해서도 짜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당신이 느끼는 짜증은 전부 그동안 억압해 왔던 원래의 짜증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140p


삶에서 무엇이 당신을 괴롭힐 때 그것은 반드시 당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실이 아닌 것을 믿고 있다고 일러주는 경종이다. 우리는 돌아온 탕아다. 우리는 가끔 비틀거리고, 멍이 들고, 두들겨 맞고, 두려워하고, 고통받고, 수없이 고꾸라지지만 결국 깨닫고, 알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 즉 영원한 알아차림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끝은 없음을 말이다.

-273p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고,

사람은 죽을 때나 돼서야 변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은 결코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으며

끝없이 변화를 겪는다.

외모든, 성격이든, 취향이든, 지식이든,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정체성이든

겉으로나 안으로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경우란 없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또한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변화를 맞는다.

좋았던 것이 싫어지기도 하며, 싫었던 게 좋아지기도 한다.

과거의 판단이 오늘에 와서 달라지기도 하며, 또 오늘의 판단이 훗날 어떻게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이처럼 변화를 거듭한다.

하지만 변화를 거듭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한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알아차림'이다.

이는 의식을 의식하는, 생의 전 과정을 지켜보는 존재다.


알아차림은 10살의 나, 20살의 나, 30살의 나, 울었던 나, 웃었던 나,

신념을 가졌던 나, 어떤 맛을 싫어했다가 좋아졌던 나, 이런 취향이었다가 저런 취향으로 바뀐 나,

그 모든 변화를 알고 있는 존재다.


우리의 변화하는 삶의 장면들이 일종의 영화라면

알아차림은 그 영화를 비추는 스크린이다.


망원경은 관찰자가 없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듯

사람 또한 알아차림 없이는 자신의 변화하는 생을 알지 못한다.


알아차림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가장 깊이 빠진 오해는

생각과 감정이 곧 '나'라는 믿음인데,


어떻게 사라지는 생각과 감정이 '나'일 수 있단 말인가?

생각과 감정이 정말 '나'라면,

그 생각과 감정이 사라질 때 '나' 또한 함께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왜 생각과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여

스스로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판단에 매여 고통을 부여해야 하는가?



판단을 멈추면 고통도 멈춘다.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 하는 행복은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이 곧 내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

이게 바로 영원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위대한 시크릿'이다.


나는 이 가르침이 왜 진실인지를 알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문이자 때때로 떠올리는 질문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론다 번의 [위대한 시크릿]은 알아차림, 또는 '깨달음'을 깨닫는 데 있어

가장 교과서적인 책이 아닐까 싶다.


나의 진정한 존재를 아는 것, 그 앎보다 더한 행복은 없으며

그 행복만이 진짜다.



>>>

♬이바디 | 끝나지 않은 이야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림자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