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자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Harald Kloser | End of the World

by 로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 건너편, 화면 너머, 종이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크리스는 그 존재와 눈을 마주친다. 크리스는 당신의 눈을 바라본다. 원망과 불만, 호기심이 섞인 시선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SF 보다 Vol. 4 그림자



"닉스는 자연 블랙홀이 아니야.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이지. 헤일로를 구성하는 암흑 물질도 마찬가지고. 둘 다 우주에서는 결코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없는 특징들을 갖고 있어. 주의 깊게 배합된 암흑 물질들은 스스로 중력 조절제의 역할을 하며 닉스의 광학적 격리 궤도를 안정화하고 있지. 우리 계산에 따르면 최대 3천 년 동안은 안정적으로 빛을 격리할 수 있어."

-31p, 오 마이 크리스타


아라냐는 처음에 강대국들이 만들어낸 신형 무기로 오해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침공 당시의 인공위성 사진이 공개되며 우주에서 온 생명체라는 것이 밝혀졌다. 발파라이소에서 한날한시에 죽은 사람들을 부검했을 때 그들의 머릿속은 아라냐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54p, 순환 순수 역학


그림자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너를 지배할 순 없어. 나는 어디까지나 보조야. 신체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어. 심장이 아무리 중요한 기관이라고 해도 뇌를 지배할 순 없잖아. 나는 너의 그림자니까 본질은 될 수 없어.]

-109p, 두번째 선악과


재연은 답답해서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림자는 돈이 떨어졌습니다. 여행을 계속하려면 충전이 필요합니다.>

-143p, 그림자의 여행


56엔 원주민인 프로그램과 55 시민의 아바타가 공존한다. 이방인이라는 표시로 아바타는 그림자가 땅바닥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56이 55에서 파생했다 해도 55를 진짜 현실로 보긴 어렵다. 54는 55의 원본, 53은 54의 원본, 52는 53의 원본이라 결국 마천루 1만 진정 유일한 현실로 여겨진다.

-167p, 끈끈이



우리의 세계에서 그림자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수동성이다.

능동적으로 사고하여 움직이는 주체가 아닌, 주체를 따라다니며 반영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그림자가 살아있게 된다면?

객체의 역할이 아닌 주체의 역할로, 서브에서 메인으로, 지구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로 인정받게 된다면?


소설 속 그림자는 우주적 차원에서부터 그 존재를 드러낸다.


자연 블랙홀을 본떠 만든 인공 블랙홀부터 시작해

제2의 뇌와 다름없는 침습형 뇌 컴퓨터 다브DAW,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보조 인격 그림자 사람,

앱을 통해 나 대신 여행하는 그림자, 가상 세계와 가상의 인간까지.


진짜와 가짜의 경계, 빛과 그림자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생각은 피부 위를 뒤덮는다.


한결같이 아스트랄하면서도 키치적인 심오함을 지닌 이 소설의 압권은

가장 처음에 실린 소설의 끝마무리 멘트였으니,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 물음 안에 그야말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종이 속 인물은 종이 속에 소개된 화면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이윽고

종이 밖을 내다보며 '나'를 만난다.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본다.

나는 곧 종이 속 인물이자, 글이자, 글로 존재하는 화면 속 인물이며─

모든 게 된다.


그림자 세계를 방문하는 건 순환의 여정이며 열역학 제1법칙의 실재를 증명하는 여정이다.

이 세계도 옳고, 저 세계도 옳다.


세상의 이면, 혹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찾지 못했던

그림자의 세계가 바로 이 책 속에 있다.



>>>

♬Harald Kloser | End of the World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형태가 없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다루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