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번 주말에 비가 오면 벚꽃이 다 떨어질까요?”
평소에 질문을 거의 하지 않은 A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습니다.
수업이 일찍 끝나면 아이들과 음악을 듣곤 하는데 그 날은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들었습니다. 노래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A가 툭 던지듯이 주말 비 소식과 벚꽃에 대해 물었습니다.
다음 곡으로 ‘벚꽃엔딩’을 들려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짜식~ 여자 친구가 생겼나 보네. 벚꽃 피는 날 데이트 약속을 했나?
꽃이 다 떨어질까 봐 걱정을 하다니. 귀여운 녀석!’
A가 이제 막 설레는 첫사랑을 시작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첫 데이트를 망칠까 봐 걱정하며 쑥스럽게 물어보는 A를 안심시켜 줘야 했습니다.
“이제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하니까 비가 와도 벚꽃은 거의 안.떨.어.질.거.야.걱.정.하.지.마”
대답을 들은 A의 표정이 울듯이 일그러졌습니다.
엉거주춤 팔짱을 끼고 몸을 세우고 있던 A는 책상 위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곧 다시 얼굴을 들면서 기대가 어긋났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A는 벚꽃으로 꽤 유명한 관광지 식당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나들이 나온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일이 너무 힘들었는데 다행히(?)
이번 주말에 비 예보가 있어 벚꽃이 많이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벚꽃이 미운 열 여덟 살.
우리 학교의 아이들이 파업을 하면 지역 경제가 멈춘다는 서글픈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샤부샤부 식당에 가면 예전에 담임을 했던 졸업생이 특별히 하트 모양으로 볶음밥을 정성껏 만들어 줍니다. 며칠 전 초밥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낮에 수업 중에 계속 엎드려 자던 학생이 생글거리며 주문을 받으러 왔습니다. 너무 친절하게 메뉴 설명까지 하는 걸 보며 묘한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7년 전 소읍에 온 지 한 달쯤 됐을 무렵 담임을 맡고 있던 아이가 치킨 배달을 왔었습니다. 늘어진 면티에 무릎 나온 수면 바지를 입은 담임과 휴대용 카드 단발기를 든 학생은 원룸 복도에서 어색하게 영수증이 로딩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10초 남짓한 시간의 민망함이 지난 후 영수증을 건네주는 아이에게 '천천히 조심해서 다녀! 알았지’라며
애매한 훈계만 건넸습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갖고 싶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휴대폰 요금을 내기 위해서 그리고 시간이 남아서 처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생계의 일부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도 빠질 수가 없습니다. 담임으로서 차상위 계층, 기초생활수급 가정,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등 어느 정도의 경제적 상황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외부 장학금을 지원하기 위해서 담임추천서를 작성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놀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고 있는데 자폐증이 있는 동생이 갑자기 입을 주먹으로 때렸어요’
코로나19가 오기 한참 전 H는 한 여름에도 마스크를 쓰고 다녔습니다. 수행평가 점수에 민감했고 쉬는 시간이면 눈 화장을 고치는 아이였습니다. H의 담임 추천서에는 ‘치아가 부러졌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00 장학금을 지원받아 한창 외모에 민감한 H가 자신감을 갖고 학교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썼습니다. H는 낮은 성적으로 장학금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H의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일하시다 추락을 하면서 다행히(?) 다른 외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사업이 망해서 우울증 때문에 집에만 있으세요.
저번에는 너무 아팠었는데 병원 갈 돈이 없는 거예요. 그냥 아빠랑 둘이 붙잡고 새벽에 울었어요”
J는 교과서 대금, 급식비 일 년 치 모두가 밀려있었습니다. 진급사정위원회에 심의 대상이 된 J를 돕기 위해 장학금 추천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무단지각과 무단결석이 잦은 아이라 성실한 학교생활에서 다른 추천 학생에게 밀려 장학금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J는 출결은 안 좋지만 학교에서 말썽은 피우지 않는 얌전한 아이라고 강하게 어필을 해서 교직원 월급에서 잔돈을 모은 부스러기 장학금의 혜택을 어렵게 받았습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담임 추천서를 쓰다 보면 ‘불행 배틀’ 같다는 생각이 늘 듭니다.
장학금 추천서는 불행을 자극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참으로 잔인한 글쓰기입니다.
여러 아이들의 불행 속에서 우리 반 아이가 더 남루해보이기 위해 쓰는 일은 언제나 저를 착잡하게 합니다.
‘불행 배틀’의 승자가 되어 장학금을 받게 된 아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게 맞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담임인 나는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햐 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불행 배틀’은 우수한 성적, 모범적인 학교생활, 어려운 가정형편의 교집합이 완벽할 때 승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이런 확률이 드문 편이라 조건이 맞는 몇몇 학생은 액수가 많은 장학금을 골라서 선택을 할 때도 있고 중복 수혜를 받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H나 J와 같이 경제적 도움이 절실하지만 조건(?)을 충족할 수 없는 장학금 불행 배틀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입니다. 더 낮은 불행과 가난은 성적과 성실함에 밀려납니다.
자폐증 동생에게 자다가 느닷없이 맞아 앞니가 부러진 채로 학교에 갔다면 수업시간에 무슨 생각을 할까요?
집요하게 거듭되는 실패로 무기력해진 아빠와 단 둘이 맞는 아침, 등교시간에 맞춘 알람 소리는 들릴까요?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받으며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을 졸업했고 교사가 됐습니다. 주말마다 4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급의 대부분은 옷을 사는데 썼습니다.
온실에서 자라온 화초 같은 어른이었습니다.
반면 저와 만나는 아이들은 들판에서 강한 햇빛과 거센 바람을 그대로 맞는 들풀같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르바이트로 번 월급은 실직한 부모를 대신한 가족의 생계비가 되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병원비가 됩니다.
먹고 사는 일에 십 대의 시간 절반을 써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신의 집요한 불행들을 다른 이의 불행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자주 마주합니다. 생의 비애가 꾸역꾸역 북받쳐 올라올텐데도 울지도 않은 채로 건조하게 자신을 나레이션합니다.
담임추천서를 쓰기 위해 내밀하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희 들이 선생이다.
나라면 학교에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준다는 보험처럼 ‘그냥 주는 장학금’ 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출결이 좋지 않아도, 좀 삐딱해도
그래서 어느 하나 잘하는 게 없더라도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아니, 그런 아이들만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아이들이 받는 장학금은 돈을 넘어 위로가 아닐까요?
아무 날도 아닌데도 꽃을 선물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받은 꽃이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봄날을 되찾아 준다면
벚꽃이 곱절로 예뻐보일 것 같습니다.
“너 많이 힘들어 보여. 우리 서로 잘 모르고 친하지도 않지만 괜찮다면 좀 안아줄게”
조건 없이 ‘그냥’ 안아주는 HUG 처럼 '그냥' 한번 우리 아이들을 안아주면 안될까요?
가난때문에 더 이상 따끔따끔 아프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