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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Apr 21. 2021

화가 할배 친구

친구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일요일 밤,  화가 할배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오쌤! 울집에 두릅, 오가피, 민들레 자연이 주는 먹거리가 많아요. 언능 오세요. 며칠 지나면 없어요"    

일흔다섯 살, 아버지 뻘 되는 할배지만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와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은 온도의  친구 사이로 지낸 지 3년이 됐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친구의 기준을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정해두고 살았습니다.

관심사와 가치관이  공유되는 사람이어야 답답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읽은 책 어느 부분에 함께 밑줄을 그을 수 있고 내가 본 영화의 어느 장면이 같이 기억에 남기를 바랬습니다. 기왕이면 흐린 날에 생각나는 음악 한 두곡 정도는 같았으면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함께 옳다고 여겨야 했습니다. '동질성'을 친구의 우선에 두었던 거지요. 그렇게 혼자 금을 긋고 제가 정해 둔 동질성과 비켜나 있는 사람들을 답답해 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며 밀쳐냈습니다.


화가 할배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스토너'가 어떤 책인지 4월이면 늘 듣는 'April'이 어떤 노래인지 모르십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는 저를 화가 할배는 불신자(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 리스트에 올려놓고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매일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어쩌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극명하게 다른 생각 때문에 '오쌤! 정치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죠'라며 화가 할배가 먼저 말을 거두십니다. 화가 할배는 저와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많지만 계절이 바뀔때마다 안부를 묻고 밥을 먹으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슴슴한 친구입니다.



3년 전 귀촌을 마음먹고 출퇴근 거리에 있는 시골집들을 꽤나 열심히 보러 다닐 때였습니다.  

화가 할배가 리모델링한 농가주택이 실린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집의 낡은 시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변신시킨 화가 할배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연락을 드렸더니 우연인지 제가 살고 있는 소읍에 살고 계셨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집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화가 할배는 시골집 매물이 있으면 함께 답사를 다녀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부도 물을 겸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식사를 마치면 화가 할배는 늘 차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화가 할배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셨고 저는 할배의 일상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꽃밭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을 다니시는 이야기, 시장 안에 개업한 싸고 맛있는 칼국수집 이야기, 고철을 보면 어떤 작품을 만들까 생각하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장가 안 간 막내아들 이야기 , 등록금이 없어 미대를 중퇴하신 이야기 그리고 이번 주말엔 꼭 같이 교회에 가자는 이야기..


화가 할배의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소사를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 집으로 돌아갈 때는 늘 평온함이 차올랐습니다. 그저 일흔다섯 살 어른의 밍밍하고 슴슴한 일상을 엿들었을 뿐인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화가 할배를 만날 즈음은 일터에서 사람들의 말(言)에 치여 있었고 말(言)이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능력과 경험에 비해 떠밀듯이 맡겨진 중책의 무게감에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거의 모든 대화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였고 일에 관한 이야기들을 할수록 억울해지고 화가 날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이 얽히는 일터의 말(言)은 타인의 서사일 때가 많아서 타인의 말(言)을 하고 돌아서는 날은 내가 나에게 불쾌했습니다. 날카로운 말에 베이던 시간이었습니다.  화가 할배의 밍밍하고 슴슴한 일상의  말(言)은 모나지 않고 둥그러워서 말(言)에 베일 일이 없었고, 밥벌이와 멀어져 있는 말(言)이라 그저 제 귀를 거쳐 흘려보내면 그만이었습니다.


어제 일을 마치고 화가 할배의 집에 들렀습니다. 공공 근로로 꽃을 심고 오신 날이라 목소리가 퍼석거렸습니다. 담장에 있는 오가피 순을 뜯어 새콤하게 나물반찬을 만들어 봉당에서 할배와 밥을 먹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동네에서 두번 째로 좋은 집에 살면서 정말이지 교만하게 살았어요. 정권이 바뀌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때는 늘 불안했어요. 어느 날 죽은 아내와 그 해의 마지막 날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회개 기도란 걸 했어요. 고등 공민학교 다닐 때 그림 대회에 나가면 일등은 다 휩쓸었어요. 며칠 전 막내 아들이 결혼할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화가 할배의 긴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가면서 올려다 본 하늘 빛은 수수했습니다.  

낮의 시간에서 밤의 시간으로 물러난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소읍의 심심하고 밍밍한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부제목: '한 번에 되지 않은 사람(김경호 저)' 중 친구의 자격에서 빌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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