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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i aber Einsam Apr 09. 2020

꽃분홍 서면을 제출하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은 대체로 법원이 선호하는 글자체, 크기, 줄간격으로 편집하여 제출한다. 맞춤법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최대한 격식을 갖추어 진지한 서면을 낸다.

민사, 가사, 행정소송은 전자소송이 잘 되어 있어서 인터넷으로 대법원 사이트에 접속하여 제출하고 형사는 전자소송화 되어 있지 않아서(피해자, 피고인 등의 인적사항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라는데...잘 모르겠다. 진짜 그 이유인지는), 형사는 아직도 직접 몸소 법원에 가서 제출하거나 기록을 검찰청에 복사하러가곤 한다.


그 소송은 행정소송이었다.

난 행정청의 대리인이었는데, 행정청 대리인이면 담당 공무원과 의견을 주고 받고 자료도 건네받고 하는 일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소송은 답변서를 쓰면서 넣을까 뺄까를 망설였던 부분을 꽃분홍색으로 칼라처리를 하고 공무원과 의견을 주고 받았었다. 이미 빨강, 파랑 온갖 색으로 알록 달록 색깔을 주고받으며 바꾼터였고 나머지 부분은 해결되어 검정으로 바꾸었고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부분을 꽃분홍색으로 표기를 한 것이다.


형사를 제외한 재판은 보통 "각하", "기각", "인용"으로 나뉘는데, 원고는 인용을, 피고는 각하와 기각을 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사건은 각하부분을 주장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각하주장 부분을 처음, 본론의 내용, 결론 모든 부분을 꽃분홍색 처리를 해두었었다. 그리고, 공무원과 의견을 나누다가 일단 각하 주장을 하겠다고 얘기를 하고 내가 건네준 내용 그대로 제출하기로 한 것이다.


난 외부에 있었는데, 직원분께 그 파일을 그대로 제출해달라고 말씀드렸고, 그 직원은 문자그대로 "그대로" 제출한 것이다. 우리 둘 모두에게 잘못이 있었다. 나는 "꽃분홍 색은 검정색으로 바꾸어서 제출해주세요."라고 했어야 했고, 직원도 전자소송사이트에서 한장한장 넘겨보고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확인했어야 했다. 

결국 꽃분홍색으로 곳곳이 표기된 채로 서면이 제출됫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첫 기일에 법정에 출석한 나는, 한 기일을 더 달라는 피고에게 "몇달이나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아서 더는 제출할 것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오늘 종결을 구하려고 했는데요."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난 재판을 다니면서 재판장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50대의 연륜이 넘쳐보이시는 재판장께서 하회탈이 되도록 아주 크게 웃으시면서 (난 그때 따라 웃었다. 뭔가 분위기상 나도 웃게 되는 것이었다. 응 뭐지? 하는 기분이 들면서),

"피고, 첫 기일인데 너무 한거 아닌가요? 원고에게 한 기일 더 줍시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기일을 더 진행하고, 사건이 종결되었고, 각하되어 우리가 승소하였다.


판결문을 출력하려고 전자소송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을 하다가 예전에 내가 쓴 답변서를 보게되었는데, 헉!

정말 깜짝 놀랐다.

곳곳에 꽃분홍 문장이 한 뭉탱이씩 선명하게 표시되어 제출된 것이 아닌가.

갑자기 왜 첫 기일에 나를 처음 본 그 재판장께서 그렇게 환하게 웃으셨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 분의 경험상, 꽃분홍으로 곳곳이 물든 서면은 처음 받아보셨을 것이다. 빨강이나, 파랑도 아니고 꽃분홍색으로 표기된 그 서면을 보시고 얼마나 어이없으셨을까.

근데, 그 변호사가 첫기일에

"종결을 구하고 싶었는데요"

라고 마음의 소리가 갑툭튀하는 대답을 했으니, 정말 엉뚱한 애라고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

물론 결과는 꽃분홍으로 표기된 각하. 되어 승소였지만, 내가 주장한 것 외에 다른 내용으로 각하되었다. 

좋게 생각하자면, 그토록 강조했으니 각하를 열심히 검토해주셨는지도 모른다(아아. 이쯤되면 정신승리다).


그 이후에도 1년 내내 그 재판부에서 여러 사건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날처럼 머리를 묶으면 더 친절하신 느낌이고, 머리를 풀고가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물론 나의 기분일 뿐이다), 항상 머리를 묶고 재판에 임했다.

'접니다. 큰 웃음 드렸던 꽃분홍 서면'

이런 맘이었달까ㅎㅎ

뭔가, 나도 모르게 정이 든것 같은 재판부였고, 재판 진행도 부드럽게 해주셨고, 모든 사건을 승소했다. 재판부는 주로 1년에 한 번씩 바뀌고 올해는 그 재판부가 모두 바뀌었다.


온화하게 화알짝 웃어 주셨던 재판장님.

지금은 확인해보니 서초동 중앙지방법원에 와계셨다. 

아마, 식사중에라도 한 번쯤 재미삼아 얘기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야, 난 세상에 곳곳을 꽃분홍색으로 표시해서 낸 서면을 봤어. 너네 그런거 본적 있냐? 우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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