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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6_1002

퍼플아티스트의 답문



  안녕하세요, 20210126_1002 님 :)

  오늘은 어떤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어요?




  밤 11시쯤 방에 들어가면 라디오부터 켜던 학창 시절의 당신처럼, 저 역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던 무렵의 기억이 꽤나 또렷합니다. 11살 때 이사 간 아파트의 주방, 나무 무늬가 그려진 찬장 밑에 가늘고 긴 검정색 라디오가 붙어있었어요. 동그란 버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맞춰야 하고, 라디오의 기능을 제외하면 시계로만 사용할 정도로 단순한 디자인이었죠. 어머니는 거의 매일 FM95.9 채널에 맞춰 라디오를 틀어놓으셨습니다. 그 덕분에 라디오의 매력에 물들어갈 수 있었어요.


학기 중에는 학교, 학원을 다니느라 못 듣는 날이 많았지만 1주 남짓한 방학 때면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 시대', '재미있는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심심타파'까지 라디오와 함께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중에서도 1999년부터 양희은 선생님이 DJ로 계셔주시는 '여성시대'는 지금도 정말정말 좋아한답니다! 제가 양희은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느낌은 당신이 석양을 보며 느끼는 느낌과 많이 닮아있지 않을까 싶어요.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감정들이 한아름 느껴지지만 무언가 따뜻하고 감싸주는 듯한 느낌..


문화방송(MBC)에 근무할 당시 제가 근무하던 층과 라디오 스튜디오 층이 가까이 있어 가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러 가기도 하고, 스트레칭할 겸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주말 방송 녹음 중인 선생님 목소리를 듣기도 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어떤 날은 갑자기 들리는 선생님 목소리에 행복해서 입이 귀에 걸릴만큼 웃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울컥 눈물이 나서 쇼파에 앉아 한참 울기도 했더랍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대학 졸업식이 취소됐을 때는 제가 보낸 문자가 여성시대에 소개되어 서경석, 양희은 선생님 두 분 모두의 응원과 위로를 받았었는데, 그때 어머니께 "엄마!!! 이거 들어봐!!!!!" 신나서 들려주는 제 문자 사연을 듣고 어머니께서 감동받아 펑펑 우셨던 추억도 있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낯설어하던 어린 시절의 당신. 그때 속으로 삭이던 여러 감정, 생각, 외로움을 라디오라는 매체와 함께하며 풀어내었다는 이야기가 정말 너무도 반가웠어요. 인터뷰 당시 이소라 DJ에 대한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는데 조금 더 자세하게 '관련된 추억(사연, 문자, 노래 등)이 있는지', '라디오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지 못한 질문들이 계속 떠올라 아쉬움만 짙어지네요.


하지만 10대 때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해소와 공감을 배우며 성장했을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려지며 참 기특하기도, 열정 다해 살아내고 있는 지금이 조금 더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좋은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당신의 좋은 기억들을 나누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답문을 작성하는 목요일 아침. 제가 DJ이자 PD이자 엔지니어로 제작 중인 마포FM '나 뿐 라디오'를 본방송으로 틀어놓았습니다. 퍼플아티스트가 기획한 코너, '커피 한 잔, 죽음 한 모금' 코너로만 한 회를 채운 특집 방송이 나오는 날이었어요.


문득 프로그램을 진행한 1년 남짓한 시간동안 죽음을 '보여지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내 의지를 가지고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EE''LOOK'의 다른 점을 말해준 당신의 말이 인상깊이 남았었는데, 분명 그 영향을 받은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저 단순히 보여지는 죽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보고 생각하는 죽음을 말해가리라 다짐했습니다.


이 모든 깨달음과 추억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하며 답문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저에게 깊은 통찰, 귀한 경험과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어주셔서 온 마음 다해 감사드립니다.




  죽음을 그리는, 퍼플아티스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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