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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읖 Mar 12. 2020

[차분(茶分)한 시간, 보리차]

1. 보리차


유독 하루가 참 길고 힘든 날이었는데 늦은 시간 터덜거리며 집에 도착해보니 현관문을 여는 순간 뜨끈한 온기가 훅 느껴졌다. 가스레인지에는 큰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고, 보리차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 참 단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뜨끈한 온기를 내뿜으면서 구수한 향을 풍기는 그 주전자에 하루 종일 지쳐있던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있던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어머니께서는 항상 물을 끓여주신다. 대부분은 보리차, 가끔은 우엉차나 둥굴레차. 그래서 나는 여전히 생수보다는 보리차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다른 여러 종류의 차도 즐겨 마시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차’를 통해 지나간 하루를 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차와 함께 하는 일상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혹시 보리차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델몬트 병’을 떠올릴 것 같다. 국민 보리차 병이기도 했던 튼튼한 그 유리병. 일상에서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델몬트 병이 떠올랐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보리차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팟캐스트의 이름도 보리차로 짓게 됐다.  여러모로 내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차가 보리차인 것 같으니까.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차가 어떤 게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사람에게 익숙한 무언가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갖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이야기도 있듯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그 소중함을 잊곤 하는데, 문득 잊고 있던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한 번씩은 찾아오는 것 같다. 내게 힘든 하루를 잠시 잊게 해 준 끓고 있는 보리차의 그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이 사소한 보리차 한잔에 힘을 내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 못 했었는데, 어쩌면 매일 마시며 작은 힘을 얻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보리차 얘기로 돌아와서, 국민 보리차 병이 존재했을 만큼 굉장히 익숙하지만 요즘은 델몬트 병에 보리차 담는 걸 보기가 힘들다. 식당에 가도 대부분은 정수기를 사용하고, 생수를 사용하니까. 물론 매일 보리차를 마시지만 그래서인지 밖에서 보리차를 만나게 되면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보리차를 주는 식당은 괜히 더 애정이 가기도 하고. 물론 우리 집에도 델몬트 병은 사라져 버렸지만 이 델몬트 병을 꼭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식수 대용으로 마시던 보리차는 꽤 많은 효능을 갖고 있다. ‘보리차’를 검색해보면 '겉보리를 볶아 물에 끓인 것으로 숭늉과 함께 즐겨 마시던 고소한 우리 전통 곡차 중의 하나.' 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식수로 많이 사용했던 이유 중 하나는 많이 마셔도 부작용이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보리차는 신진대사와 변비해소, 대장의 기능 향상, 노폐물 분비 촉진, 혈중 콜레스테롤 함량을 저하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보리가 찬 성질을 갖고 있어서 열이 많은 사람에게 좋고, 동의보감에서는 식욕부진이나 위장의 허약 증세에도 좋고 피부도 윤택하게 하는 효능을 갖고 있다고.

그리고 신기한 건 보리를 수돗물에 넣어 끓이면 여러 중금속이나 해로운 것들이 중화된다는 점이다. 약간 태운 보리가 숯과 같은 구조를 갖게 되기 때문에 숯처럼 조직이 성글어지고 탄소성분을 함유해 중금속을 빨아들이게 되는 원리라고 하는데 이런 효능들 때문에 정수기가 등장하기 이전 우리의 식수로 가장 많이 마셨던 게 아닐까?


이런 보리차는 일본에서는 '무기차'라고 하는데, 일본이나 중국 같은 경우는 녹차 종류를 더 선호하다 보니 우리나라만큼 일상적이진 않다. 하지만 여름에 시원하게 보리차를 마시는 모습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다고. 근데 정말 특이한 건 이탈리아에서도 보리차를 마신다는 것. 이탈리아식 보리차는 ‘오르조’라고 하는데 커피 대용 음료로 만든 거라고 한다. 굉장히 커피와 유사한 색깔을 볼 수 있다. 맛은 커피와 비슷한데 카페인이 없고 섬유소가 많아서 이탈리아인들이 자주 찾는다고. 오르조를 판매하는 곳은 사실 쉽게 볼 수는 없는데, 집 근처 작은 카페와 파스쿠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파스쿠찌의 오르조는 우유를 가미해서 좀 더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형태였는데 달큰하지만 커피와 비슷한 향과 풍미가 있어서 정말 신기했다. 우유와 함께 마시지만 뒷맛이 텁텁하지 않은 게 꽤 마음에 들었다. 다만 우유나 첨가된 단맛 때문에 깔끔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선택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웠다. 집 근처의 카페에서 발견한 오르조는 파스쿠찌에서의 아쉬움을 날려주는 깔끔함이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데 겉보기에는 진한 아메리카노의 색을 띠고 있었다. 맛은 우리가 흔히 마시는 보리차 같진 않았다. 진한 보리차와 아메리카노 그 중간 어디에 있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보리로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커피 특유의 향이나 쌉쌀한 맛 대신 구수함에 가까운 향과 깔끔한 뒷맛이 참 매력적이었는데,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마실 수 없는 임산부 분들께서 왜 좋은 커피 대용 음료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커피는 마시고 싶지만 카페인 때문에 망설여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은 드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동네 카페에서 만난 오르조. 두 번째 사진은 포커스가 나가 아쉬웠지만, 아메리카노와 굉장히 유사한 모습이다.

 파스쿠찌의 오르조. 부드러운 우유와 달달함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언제나 냉장고 한편에는 시원한 보리차가 들어있었는데 너무 익숙하고 일상적이라서 ‘차’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갈증만 달래주는 식수가 아니라 힘든 하루를 보낸 나를 위로해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니 신기하기도 했고. 어쩌면 이렇게 지나치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이 꽤 많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분(茶分)한 시간, 보리차'는 보리차처럼 일상적이고 친근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차와 함께 하는 일상과 추억, 더불어 차의 효능과 역사 등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이 주제다.


'차분(茶分)한 시간, 보리차'는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팟캐스트로도 만날 수 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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