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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읖 Nov 19. 2020

[차분(茶分)한 시간, 보리차] 12. 호지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 쉬어가는 차 한 잔

본의 아니게 활동반경이 굉장히 작아졌음을 느끼는 요즘이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알지만 집순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저는 처음에는 굉장히 답답했었어요. 다행이랄까 싶었던 건 마침 가을을 타서인지 세상 모든 것에 의욕을 심하게 잃었다는 거였습니다. 살면서 이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는데, 스스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내가 인지하는 걸 보니 그래도 아직은 괜찮나 보다.’라는 생각이 드는 반면에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건지 말 그대로 머릿속이 깜깜 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핑계 삼아 정말 게으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근데 또 웃긴 건 이렇게 보내는 게으른 하루하루에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는 거예요. 이 불편한 마음을 계속 안고 갈 자신은 없어서 ‘움직여봐야겠다.’라고 생각은 하는데, 문득 ‘내가 너무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날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없었네.’라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 주어져도 그 시간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었나 봐요.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각한 우울의 상태가 아니라면 한 번쯤은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바닥까지 내려간 김에 뭔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거든요.



저는 평소에도 생각이 좀 많은 편이긴 한데, 생각이 많다고 해서 걱정을 하는 편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대외적인 상황들도 그렇고 한 없이 우울 해지 다 보니까 평소에 비해 생각이나 걱정이 끝없이 늘어나더라고요.

이런 제 심리상태와는 정 반대로 요즘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좋잖아요. 그래서 그냥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휴대폰 하나 챙기고 무작정 찻집으로 향했어요. '뭐라도 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요. 익숙한 찻집에 가는 것도 좋겠지만, 이상하게 그냥 낯선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무작정 검색을 하고 집 근처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새로운 찻집을 발견했어요.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할 정도로 외관에는 눈에 띄는 간판도 없는 그런 곳이었어요. 나중에 나오면서 보니 찻집의 이름을 표시해 둔 무언가를 발견하긴 했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겠다 싶은 정도였어요. 내부도 그리 넓은 곳은 아니어서 창가 자리까지 다섯 테이블 정도만 있었는데, 이미 가득 차서 창가 자리만 남아있더라고요. 다행히 날이 춥지 않아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호지차를 주문했습니다. 고소하고 달콤한 호두정과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지차 한잔을 마시는데, 창가에만 자리가 남아있던 게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더라고요.

가져간 책을 펼치고 중간중간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비 냄새가 나는 거예요. 왜 비가 내리기 전이나 내리기 시작할 때 나는 특유의 흙냄새 같은 것들 있잖아요. 일기예보엔 비 소식이 없었는데, 창 밖으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읽던 책을 덮어두고 하염없이 비 구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부산스러운 사람들도, 주차된 차에 떨어지는 빗방울들도 잠시나마 아무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호지차라는 이름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익숙해하실 것 같아요.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스타벅스의 호지 티라테, 그리고 오설록에도 호지차 라테가 있고요. 개인적으로 오설록의 호지 티 스프레드도 입맛에 맞았던 기억이 있어요.

이 호지차가 녹차와 어떻게 다른 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일단 호지차는 녹차의 한 종류입니다. 녹차와 다른 점은 찻잎을 쪄서 말린 후 그것을 다시 볶았다는 건데요, 한국식 차들 중에 덖는 과정을 거치는 차들이 있는데 이런 차들과도 약간 차이가 있어요. 덖는다는 건 차의 생 잎을 볶듯이 하는 건데, 이 호지차는 쪄서 말리는 과정이 있는 일본식 차입니다. 호지차는 가장 늦게 수확하는 찻잎을 사용하는데요, 아무래도 차의 맛이나 상품성이 조금 떨어지는 대작이기 때문에 찌고 말리고, 볶는 과정을 거치면 구수한 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해요. 녹차 특유의 떫은맛은 적고 구수한 맛이 특징입니다. 차의 색도 녹차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진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요즘은 호지차 라테 등 다양한 모습으로 호지차를 즐길 수 있는데요, 차의 맛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호지차에 익숙해지는 데에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특히 호지차를 이용한 디저트들도 등장하고 있어서 녹차와는 또 다른 매력을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반갑습니다.






 지난주에는 이상하게 어떤 글도 써지지 않았습니다. 미리 생각해 둔 차가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 그 차에 대해서 써 내려가고 싶지도 않고 억지로 쓰려고도 해봤지만 너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내려놓고 무작정 새로운 찻집을 찾았던 건데, 덕분에 좋은 호지차를 마실 수 있었어요.

살아가면서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잖아요. 무언가를 해야 하긴 하지만 내키지 않을 때도 많고, 억지로 해 나간다고 해도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경우에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 보려고 해요. 그 덕분에 좋은 찻집을 알게 됐고, 좋은 차도 만나게 되었으니까. 내키지 않는 무언가는 잠시 내려두고 숨을 고르다 보면 의외의 발견이 따라올 수도 있으니까요. 가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올 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차 한잔과 함께 하는 여유를 갖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는 걸 호지차 한 잔 하며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순간을 잘 기억하면서 이 가을을 잘 보내줘야겠습니다.




'차분(茶分) 한 시간, 보리차'는 보리차처럼 일상적이고 친근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차와 함께 하는 일상과 추억, 더불어 차의 효능과 역사 등 차와 관련된 모든 것이 주제입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381/clip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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