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12 로마의 기억1

스쳐가는 나쁜 기억. 오래 남는 좋은 기억.

by 카밀라


일반적으로 동선이 편하다고 생각되는 루트는 굳이 따르지 않는 편이다. 시간이 많은 학생여행자라서 일정을 길게 잡을 여력이 되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지만, 조금 돌아가야 하고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가고 싶은 곳만 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내 여행 스타일이다. 커피도 사랑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도 흥미가 많은 내가 이탈리아를 안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계획을 짜는 동안, 어찌 된게 다른 도시들은 다 마음에 드는 데 이 로마 한 군데만 영 끌리지 않았다. 호스텔도 적당히 만족할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고, 그렇다 할 맛집이 있는 것같지도 않았으며, 소매치기나 인종차별 등의 경험을 얘기하다 본의아니게 겁을 주는 글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왠지 피곤하기만 할 것같은 기분이 출발도 전에 들어버렸다.


그렇지만 로마를 패스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읽어왔던 여러 세계일주 여행기에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했던, 그리고 11년 전 엄마도 다녀왔던 바티칸 시국이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대한 열정으로 두려움을 누르고! 로마일정을 3박으로 잡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티칸만 본다, 바티칸만 본다.. 하고 되새기며..



배낭을 이고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에 걱정이 조금 있었는데, 걱정했던대로 힘들긴 힘들었다. 공항을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두시간 가량의 짧은 비행 후, 배낭을 다시 이고 낯선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이 때는 초반이어서 더...) 로마 공항에서는 입국 심사만으로도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했어서 몸이 지쳐있었는데, 이 곳이 로마라는 생각에 더 정신을 차려야 된다고 생각하며 기차를 타고 길을 찾으니 하루종일 온 몸이 시달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밥 한끼 못먹고 몇 시간에 걸려 오후 늦게 도착한 숙소는 다행히도 꽤 안락하고 마음에 들었다. 숙소는 Orsa Maggiore hostel women only 로 여성전용 호스텔이었다. 한적한 동네에 있어 찾아갈 때는 걱정이 들었지만, 덕분에 조용히 머무르다 갈 수 있었다.



수상한 소매치기 하나 안 마주치고 잘 숙소까지 찾아왔겠다,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길 무렵 가방만 빠르게 풀어 놓고 장을 보러갔다. 마실 물과 다음날 바티칸을 위한 간식거리, 샴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탭에게 가까운 마트를 물어보니 도보로 10분정도는 걸어야했다. 가깝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상점이 몰려있다고 하니 갈 수 밖에. 늦게 도착해서 구경을 하러갈만 한 시간은 못되었지만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처음으로 인종차별을 겪었다.



룰루랄라 숙소와 작은 광장을 이어주는 마찌니 다리를 다 건너고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앞만 보고 길을 건너던 중, 한 차에서 아주 어린 남자초등학생 목소리의 누군가가 창문쪽을 향해 어떤 단어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결코 그것이 나를 향한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길위에 나만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누구도 나한테 말할 거리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을 다 건너고 마트를 향해 걸어가면서 문득 그 단어가 무엇이었나 생각해보니, 그 단어는 틀림없이 '치노'였던 것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어디서 들어본 단어인데 하고 생각하다 금새 그 말이 동양인을 조롱하는 대표적인 말 중 하나라는 것을 기억했다. 한참 지금보다 어렸을 적, 세계여행은 꿈에만 머무르는 생각이었던 시절, 네이버의 한 베도 웹툰에서 읽었던 인종차별 관련 내용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너무나 잠깐이었고, 100% 확실한 것도 아니었지만 잠깐동안 패닉에 빠졌다. 이렇게 쉽게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다.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금방 해야 할 일과 돌아가는 길에 집중했다. 심각히 여길 만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약간 어안이 벙벙하게 '아.. 이게 그 사람들이 말했던 것이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너무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봤자 여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으니.


점원이 영어를 못해서 약간 당황했지만 계산도 잘하고 무사히 숙소에 돌아왔다. 짐 정리를 하고 원래는 트레스테베레가 근처에 있어 가볼려고 했지만,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는 걸 보니 기운이 빠져 그냥 숙소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레스토랑이라기 보다는... 한국으로 치면 대학가나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밥집같은 느낌이었다. 지역 여성 커뮤니티로 이용되는 건물 안에 숙소와 식당 모두 있었는데, 뒷풀이 같은 것을 하는 모임이 편하게 주인과 인사하고 얘기나누며 식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에 간다면 식사메뉴는 오직 접시 크기만 두 종류인 해피아워. 10유로만 내도 한 접시에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담을 수 있는데 물은 물론, 음료도 한 잔 제공된다. 처음보는 식재료와 요리지만 다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결국 나 혼자서 주인이 조금 신경쓰일만큼 가득! 담아 먹었다. 이 때 먹은 것은 여행 전체에서 통틀어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맛있는 식사였다. 하루종일 굶다가 먹은 저녁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런던에 있다가 다양한 양념과 식재료를 사용한 요리를 먹으니 더 환상적인 맛으로 느껴졌던 것같다. 가정식으로 먹는 것들을 이것저것 가져다 놓은 것같았는데, 다른 레스토랑에서 사먹는 정식 식사메뉴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기억한다. 이탈리아 오면 꼭 가정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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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1층 침대, 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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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한잔, 밥은 토마토베이스의 소스와 비벼먹었다, 처음 맛보는 맛들. 다 비웠다!


방으로 돌아와서 룸메들과 다시 인사를 했다. 학교 수업때문에 로마에 온 친구, 회사 휴가를 내서 온 사람, 그리고 은퇴 후 자유롭게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던 사람까지. 제각기 다양한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신기한 것은 은퇴 후 여행 중인 분이었는데, 아씨시에서 로마까지 9일에 걸쳐 걸어서! 왔다고 했다. 국제변호사로 로마에서 몇년 일한 적도 있던 그녀는 이탈리아를 너무 사랑해서 여기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배낭하나와 등산화하나만 덜렁 챙긴 그 분은 영화에서나 볼 것같은 여행자였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간소한 준비로 몸 하나를 지탱하는 여행. 60대 중반 정도이실 것같았는데, 멋있다고 느꼈다. 그 때 그녀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어서, 후에 자유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년 여행자를 보면 속으로 박수를 보냈었다. 정말로 나이는 핑계구나. 이 나이에 거기까지... 이 나이에 그런데서... 라는 핑계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하는 말 아닌가?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게 언제든, 어디든 가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침대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잠들기 전에는 세심한 부분까지 룸메들을 배려하며 지내다 소리없이 떠난 그녀는 내 노년의 롤모델의 한 모습이 되었다. 후에 엄마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 꼭 이렇게 나이들자고 엽서에 적기도 했다.


다른 룸메들과도 잠깐 얘기를 나누다가 내일 바티칸에 일찍 가기 위해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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