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Assisi? 거긴 천국이야!
다음날 아침에 숙소를 일찍 나섰다. 아직 상점들이 거의 문을 열지 않은 시간, 어제는 길을 헤매느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코무네 광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코무네 광장은 아씨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광장이다.(그렇다고 런던이나 로마같은 대도시의 광장을 생각하면 안된다!) 광장을 중심으로 미네르바 신전과 작은 분수, 여러 레스토랑들이 모여있다. 아침 일찍 나서는 길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닫혀 있었다. 광장에 놓인 벤치에 앉아 동네에 해가 좀 더 들 때까지 기다렸다.
좀 여유있게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방해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묻더니 한국인이라고 하자 주머니에서 왠 태극기모양의 작은 자석을 꺼내 보였다. 오늘 밤에 광장에 밴드 공연이 있을테니 와서 같이 보자 뭐 그런 얘기였다. 수녀원에서 머무르고 있고 거기 통금이 밤 9시라 9시 공연은 볼 수 없다고 말한 뒤 바로 자리를 떴다. 위험한 느낌은 없었고, 잠깐 약국에 들렀다 광장에 나왔을 때 없어진 것으로 보아 크게 걱정할 건 아닌 것같았다. 그냥 말이 많은 동네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씨시에 혼자 방문할 여성 관광객은 알고 있어두는 편이 좋을 것같다.
계획보다는 이르지만 그 길로 바로 로카 마죠레 성곽을 보러 이동했다. 아씨시는 동네도 작지만, 골목골목에 유명 관광지가는 팻말을 잘 달아놔서차 어딘가를 찾아가는 길이 어렵지 않다(어제는 왜그랬을까). 계단과 언덕을 좀 오르긴 해야하지만 힘들지 않다. 그리고 머지않아 영화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좋은 카메라를 들고 갔더라도, 그 때의 풍경은 못 담을 것같다. 시원하게 바람이 부는 와중에, 사람은 나와 가족으로 보이는 3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도 시원하게 들렸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만큼 탁트인 평원은 어제의 고난을 다 씻겨주고도 남을만큼 멋있었다. 아씨시에 있는 모든 성당들도 다 찾아볼 수 있다. 아씨시에 오기 전에는, 런던과 로마의 도시 안에만 있었다. 그곳들이 결코 서울보다는 복잡하지 않고, 도시를 걷는 재미도 충분히 있었지만, 여행 이래로 처음 만난 탁트이고 조용한 풍경에 쉽게 벅차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지평선마저 흐릿하게 보일 수 있을까? 어디까지 이렇게 태평하게도 막히지 않은 평야가 뻗어져 있는걸까? 정말 말도 안되는 곳에 내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몇 없어서일까, 언덕을 오르면서도 언덕에 올라서도 서로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바람을 맞으면서 여기저기 사진도 찍고, 성당도 살펴보면서 놀다가 요새 안도 대충 둘러보고 다시 마을 안으로 돌아갔다.
광장으로 돌아와 먼저 젤라또부터 한 입했다. 광장에서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가는 길에 구멍가게만한 상점들이 많은데, 앤틱한 디저트가게들이 많이 있다.
광장으로 성당으로 향하는 길의 끝에서 어제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프란체스코 성당을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남매끼리 왔다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부탁하고(근데 포커스도 안맞췄더라...)성당을 들렸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지나쳤을 꽃으로 둘러싸인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12시 정각에 오픈한다고 해서 그냥 그 주변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 들어갔다.
많은 관광객분들이 그 식당밖에서 보이는 꽃담벼락에서 사진을 찍던데, 안에서 보이는 풍경도 정말 좋다. 카페만 이용해서는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없고, 레스토랑을 이용해야만 성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로마에서 한번 제대로 맛없는 파스타를 먹고 한국의 파스타가 제일 맛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에서 잘 접하기 어려운 이탈리아 음식만 먹고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라비올리를 시켰는데, 크림소스가 부어진 만두같아서 맛있게 먹었다. 계속 먹다보니 좀 텁텁했지만...
점심을 먹고 나서는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갔다. 어제 길을 한참 헤맬 때엔 정말 증오하고 싶은 장소였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보았던 성당 중 내 최애 성당이 되었다.
일요일이라 미사가 있지만, 미사 시간 외에는 제한된 구역내에서 관광객도 들어갈 수 있다. 사진촬영은 당연히 불가!
지난 밤에 휴대폰으로 프란체스코의 일화에 대해서 간단하게 검색을 했다. 본래는 아씨시의 부유한 상인이던 프란체스코는 유흥에 빠져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전쟁의 포로가 되는 경험을 겪은 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종교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가졌던 부를 버리고 청빈하고 가난한 이를 도우며 종교적 수행을 이어나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세우기까지 했다.
성당 내부에는 위의 내용을 비롯해 프란체스코의 종교적 일대기에서 중요한 사건을 그린 조토의 그림들이 벽에 줄지어 달려있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나치게 호화롭게 장식된 것을 보고 당시 교황에게 이에 대해 비판했던 모습 등의 일화 정도가 기억이 난다.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은 정말 말 그대로 관광지였다. 온갖 대가들의 작품(피에타와 같은)앞에 설치된 방탄유리벽 앞에 엄청난 무리를 이룬 사람들, 성스러운 분위기는 느낄래야 느낄 수 없는 시끄러움과 양복입은 안전요원들, 전리품 등으로 도배된 박물관 앞에서 나는 그저 종교가 과시하는 권력만을 느꼈다. 당장 성당 밖의 광장에서는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감싸고 구걸을 하는 노인이 돌아다니는데, 그 가운데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안에서 감사한 사람과 풍경은 있었지만, 성당 자체가 내게 말해주는 것은 전혀 없었다.
프란체스코 성당은 그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게 느껴졌다.(성당 재건과정과 연관된 VR체험존이 있어 상술적인인 면모가 아주 조금있기는 할 수도 있는데, 그거 아무도 신경안쓴다. 거기 직원들도...) 성당 겉이 상징적이고 화려해보이는 것은 자본이나 권력이 아닌 잘 보존된 주변의 자연의 덕이 더 크다.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 그 곳 역시 자그마하고 갖출 것만 갖춘 모양새였다. 누구든 숨죽이고 신성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의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얘기를 알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일까? 그 곳에서 '충분'과 신성한 '감사'가 무엇인지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모두 둘러본 뒤에는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유명하다는 수도원화장품도 보고(하지만 산 건 다 떨어진 화장품과 바디워시뿐...),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을 꼼꼼히 둘러보다 엽서도 샀다. 아씨시의 또다른 성당인 산타키아라나 루피노 성당 앞까지는 가보았지만 주일이라 주민들만 이용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요일에 가면 들어가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있는 성당 모두에서 저 동그란 문양이 성당 전면에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무슨 뜻일지 궁금했다.. 그냥 그 시대 건축양식(찾아보니 초기 이탈리아 고딕양식이라고 한다.)의 일부 특성일 뿐인지, 종교적 의미가 있는 문양인지... 이후 숙소에서 만난 언니에게(가톨릭 신자)물어보고 언니가 신부님께도 여쭤봐주셨지만, 건축양식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답변만 얻었다. 지금 찾아보니 '장미창'이라고 부르는 고딕양식의 기법 중 하나라고 한다. 프랑스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세부적인 문양은 제각기 다른 것같다.)
광장에 있는 미네르바 신전도 찾았다. 바깥에서부터 신전의 느낌이 강한 이곳은 성당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아주 작지만 하늘색을 바탕으로 아름답게 잘 꾸며져있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나 보던 모양의 건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지혜의 여신을 모신 곳이라는 것도 좋고.(16세기에 지어진 것이라서 진짜 고대유물은 아니다..) 의자에 앉아 잠깐 명상을 하다가 무언가 의식(?)이 시작되는 것같아서 바로 나왔다.
아씨시에서 가볼 곳을 대충 다 가본 뒤, 이탈리아에서 사랑에 빠진 샤케라또를 또 마시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처음에 점원이 여기 커피 안파는데라고 해서 알겠다하고 다른 데 찾아볼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직접 커피를 파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직원들이 점심을 먹고 있길래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다고 했더니, 커피면 괜찮다고 먹던 밥도 멈추고 샤케라또를 만들어주기까지했다. 영어가 서툴어서 주문하는데 약간 고달프긴했지만, 무알코올의 설탕!이 든 샤케라또를 잘 만들어주었다.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샤케라또 역시 완벽했다!
커피까지 여유롭게 마시고 엽서도 다 쓴 다음, 숙소에 가기전 마지막으로 성당을 들려 좀 앉아있을려고 했다. 그런데 구름이 막 몰리더니 비가 후두둑 쏟아지더라. 아침부터 계속 화창했는데... 사진을 찍다가 생각보다 더 많이 쏟아지는 비때문에 성당 지붕밑에 발이 묶여버렸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나만 발이 묶여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 여자분이 엄청 큰 우산을 들고 곤란한 표정으로 문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왠지 한국인같아서! 그리고 그 시간까지도 여기있다는 것은 아씨시에 당일치기가 아닌 숙박을 한다는 것이고, 이 근처 한국인이 갈 숙소라면 수녀원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대하고 말을 걸었는데 모두 맞춘 분이었다! ㅁㅈ언니는 가톨릭 신자로, 미사를 이 성당에서 드리고 싶었는데 성당의 보안직원이 '메사(messa)'라고만 말하며 언니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언니가 관광을 온 것인줄로만 알았던 것같다.
둘이서 좀 얘기를 나누다보니 비가 그쳤다. 저녁 먹기 전 시간이 남아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내일 떠날 때 탈 버스시간표와 정류장도 확인한 뒤, 같이 들어가 저녁도 먹었다. 내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엄청 맛있어하며 드셨다. 난 고작 두번째인 주제에 이것저것 익숙한 척을 해댔고...ㅎㅎㅎ 세상 제일 맛있던 델질리오의 와인을 몇잔 나눠마신 뒤 기분이 잔뜩 풀어진 우리는 통금시간 전까지 아씨시의 야경을 만끽하러 산책을 나섰다.
해가 진 아씨시는 여행 두번째의 "참 나"였다.(첫번째는 트라팔가 광장을 처음 봤을 때) 정말 말도 안되는 풍경이 내 눈 앞에 실재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참 나"라고 중얼거리게 되더라. 어떻게 이런 곳이 세상에 있을 수 있냐는, 기가 차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성당으로 내려가는 길의 돌담에 기대 바라본 들판은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앞에 서서, 한국에서 내가 가졌던 지저분한 감정과 고민들, 겪어야했던 문제와 사람들, 때때로 여행지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이 다 허상이 되버렸다. 아예 다른 행성으로 온 것같았다. 완벽히 다른 삶과 사람을 기대하게 되는 곳이다. 쓰레기같은 생각과 기억들을 그냥 다 꿈이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의 그림으로. 마침 지나다니는 사람은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완벽히 고요한 가운데, 군데군데 켜진 불빛이 빛나는 들판은 내가 살면서 본 것 중 최고의 안정과 평화였다. 기억을 360도 사진 찍듯이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온사방으로 그 때의 장소에 둘러싸이고 싶다. 앞으로 어떤 무료함과 고단함이 지치게 할 때마다 여기, 이 장면을 떠올리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성당을 지키는 군인과 젊은 신부와도 대화했다. 군인분의 여자친구가 한국인이고 곧 결혼을 한다며 자기 한국말 좀 봐달라고 했다. 간단한 회화였지만 발음이 좋아서 놀랐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인기가 많은 거냐며, 이탈리안맨이 어떤 것같냐고 물어보던데 속으로만 'very hairy...'라고 하고 몰라^^라고 대답했다. 길어지는 영어대화에 안녕!하고 자리를 옮겨서 넋놓고 풍경에 취했다. 9시통금을 지키기 위해 그곳을 떠나 수녀원으로 달려가면서도 많이 아쉬웠다.
숙소에 돌아가서 잠들기 전까지 언니의 재밌는 일화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피렌체가 너무 좋아서 일정을 하루 더 늘리느라 이 숙소에 체크인조차 못할 뻔했다는 얘기, 밀라노에서 아끼는 필름카메라를 잃어버리고 기차에서 울고 있을 때 뒤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꽃을 그려주면서 울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완전 에세이에서나 보던 여행이야기! 그림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한 번 심하게 아파 본 뒤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 등.밝고 에너지가 좋은 언니여서 남은 여행도 지나온 여행만큼이나 재미나게 하실 것같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피렌체가 기대되면서도, 내가 생각하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배낭여행의 모든 것을 갖춘 아씨시를 떠나기가 아쉬웠다. 다음날 아침일찍 아무도 없는 성당 앞을 지나쳐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간 아씨시를 간다고 하면, "What? Where is it?"라며 어딘지 모르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곳에 간다고 하면서 "Do you know Assisi?"라고 물어봐야했다. 아마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없게. 10에 1명 정도만 안다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같다. 그냥 쉬어가는 도시로 넣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의 6도시 중 가장 많은 것을 준 곳이었다. 직접 경험한 뒤로는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물어봤다. 당연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가 이탈리아를 갈 것이라고 하면 곧바로, Do you know Ass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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