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은 아들은 위해 남겨둔 한 줌의 빛이었으니 나는 그 빛 한 줌을 겨우 건네받을 수 있었다.
2023년 5월 7일
병실에서 나를 본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앉아있었고 아프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아파. 아파. 항상 엄마에게서 들어오던 아들이란 말과 너무나 다른 그 온도. 나는 그 온도가 두려웠다. 어린 시절 항암치료 도중 잡았던 엄마의 손과는 전혀 다른 두려운 온도. 깊이 더 깊이 나는 엄마에게 몰입했다. 엄마의 고통이 나에게로 전이되어 너무나 괴로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엄마. 엄마. 그러면 엄마는 다시 고통스럽게 아파. 아파. 그랬다. 그토록 처참한 심연의 하모니를 이해할 수 없던 아빠는 자리를 피했고 이모는 병실 한편에서 언니와 조카를 묵묵히 지켜봤다. 엄마가 엄마로서 아내가 아내로서 언니가 언니로서 살아있던 마지막 순간. 한 여자의 일생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힘겹게 쥐고 있던 그 한 줌의 눈빛에 아들을 담고서 혼을 놓았다. 엄마의 눈빛이 꺼진 그때 아들의 숨도 끝이 났다. 아니. 붙잡아야 했다. 엄마의 눈빛은 꺼졌어도 숨이 남아있었다. 그 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는 엄마의 아들로서 제 몫을 다해야 한다. 아직 고아가 아니다. 난 아직 고아가 아니다. 그러면서 계속 붙잡았던 것 같다. 그 순간을. 엄마와 아들의 순간을.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니. 훈아. 우리 언니 어떻게 해. 니 엄마 어떻게 해."
예전에 엄마를 보살피는 이모에게 고맙다 했더니 이모가 그랬었다.
'우리 언니거든.'
우리 언니. 이모의 언니. 나의 엄마이기 전에 이모의 언니. 그랬다. 이모에게도 그 슬픔은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겠지. 아빠에게 역시 그랬다. 나의 엄마이기 전에 아빠의 아내. 엄마는 나 이전에도 누군가에게 운명이었고 인연이었으며 여자였구나. 아들에게 그 모든 이름을 빼앗긴 채 나 태어나고부터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살았구나.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의 운명은 어땠을까. 여전히 이모의 언니였을 텐데 아빠의 아내이기도 했을까. 차라리 아빠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엄마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두 남자로 인해 한 여자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과거로 더 깊은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나와 눈을 맞추고 엄마는 죽음에 이르는 잠에 빠져들었다. 눈빛을 거두고 파도와 같은 숨을 내쉬었다. 거센 풍랑에 휘몰아치는 바다에 잠긴 사람처럼 거친 숨을 꺼억 꺼억 내쉬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거친 숨이 잦아들 때까지 임종을 지키는 일. 사람들이 얘기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한은 평생 간다고. 엄마는 나에게 그것조차 물려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온통 아들을 위한 생이구나. 그렇게나 온통. 엄마는 자주 얘기했다. 아들 아픈 거까지 엄마가 아플 거니까 아들은 아프지 말라고. 엄마는 오히려 운이 좋은 거라고. 아들 아픈 거 지켜보는 엄마를 겪지 않았으니 운이 좋은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엄마 아픈 거 지켜보는 아들을 겪지 않았으니 운이 좋은 거라고. 내가 죽어가는 순간에 엄마를 보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할 수 있었을지도. 결국 난 엄마의 아들이었으니까.
접이식 의자 하나를 펼쳐 엄마 곁에 앉았다.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엄마 곁에 있어야 했으니 그 자리에 앉았다. 엄마의 숨은 조금씩 잦아들다가도 다시 거세졌고 어떤 때는 메말랐다 어떤 때는 축축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숨을 내쉬었으니 입술이 차츰 말라갔다. 파삭파삭한 입술 껍질이 올라왔다. 떼어내면 아플까 봐 그대로 두었다가 엄마의 루주가 떠올랐다. 생기 있어 보여야 한다며 루주를 볼에도 바르고 입술에도 바르던 엄마. 다른 건 몰라도 나갈 때 루주만은 바르던 엄마. 메마른 입술은 엄마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침상 옆 냉장고 위에 올려진 엄마의 가방을 열었다. 네모 반듯하게 접어둔 처방전과 영수증, 빨간 지갑, 노란 손수건, 그리고 내가 몇 달 전 공항에서 준 립밤이 들어있었다. 립밤 뚜껑을 열고 엄마 입술에 갖다 대려 하는데 스틱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쓸 대로 다 쓴 립밤이었다. 바르고 바르다 더 이상 나오지 않자 밑에 남은 것을 손가락으로 비벼 바르고 바른, 끝까지 다 쓴 립밤이었다. 내가 준 물건 하나 허투루 쓴 적이 없던 엄마는 생일에 사준 시계가 고장 나도 버리지 않았고 귀걸이 하나 목걸이 하나 고이 모셔두고서 내가 집에 가면 그제야 하고 다녔다. 한번은 귀걸이 한 짝을 잃어버렸다며 울고 또 우는데 새걸 사준다고 해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보석함이 없던 엄마는 내가 생일선물로 준 물건들을 반짇고리에 컬렉션처럼 담아두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 다 쓴 립밤도 엄마가 병원에 있지 않았다면 거기에 담겨있었을 거라고. 올해는 보석함을 사줘야겠다고.
"이런 것 좀 그렇게 버리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보석함을 주고 싶어. 엄마. 엄마에게 보석함을 생일선물로 주고 싶어. 그거 받아야지. 아니. 받지 마. 그냥 받지 말자. 엄마 그만 아프자. 이제 정말 그만 아프자. 그런데 지금 입술이 무척 따가울 텐데. 울면서 내 가방을 뒤졌다. 엄마와 똑같은 립밤을 꺼내 얇은 꽃잎 어루만지듯 발라주었다. 어째서인지 엄마의 주름은 더 깊어졌고 안색은 창백했으며 그 작디작은 얼굴은 더 사그라들어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엄마의 얼굴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입술만이라도 지켜낼걸. 뒤늦게 립밤을 꺼낸 나 자신을 탓하며 가슴을 내리쳤다. 시퍼런 멍이 들 때까지 내리쳤다. 그러지 말라는 듯 마른 숨을 내쉬던 엄마가 갑자기 꺼억 꺼억 거친 숨을 내뱉었다. 우는 것 같았다. 마치 내 가슴 치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우는 것 같았다.
2023년 5월 8일
간호사가 그랬다. 가장 끝까지 살아있는 건 귀라고. 아직 숨을 거두신 게 아니니 다 듣고 있다고. 그러니까 좋은 얘기 많이 들려드리라고 그랬다. 그래서 재잘 재잘거렸다. 엄마와 좋았던 추억 몇 가지를 꺼내 잘 포장해서 재잘거렸고 책에서 읽은 좋은 문장들 몇 가지를 떠올려 잘 다듬어서 재잘거렸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와중에 많은 손님들이 오갔다. 이모들과 삼촌, 숙모, 조카들까지. 다들 제각기 엄마와의 추억이 있었겠지. 그중에서도 모두 같았던 건 엄마를 곱다고 했던 거. 이모들도 그랬고 삼촌도 그랬고 숙모도 그랬고 몇몇 조카들도 그랬다. 우리 엄마는 고왔다고. 고왔지. 우리 엄마 참 고왔지.
난 젊은 시절 엄마의 사진 보는 걸 좋아했다. 이건 언제야 하면 엄마 처녀 때 친구들이랑 시내 놀러 갔을 때라 했고 그때가 좋았다 했다. 이건 언제야 하면 엄마 미용학원 다닐 때라 했고 그때가 좋았다 했다. 이건 언제야 하면 엄마 너 낳고 가장 행복했을 때라 했고 그때가 좋았다 했다. 슬픈 일도 참 많았지만 그건 사진에 남아있지 않아서 좋았다 그랬다. 엄마 고왔던 그 시절에는 참 좋은 일들이 많았구나. 그 고운 사진들 뒤로부터 엄마가 아팠으니까 이후의 사진은 별로 없었다. 훗날 잘게 조각난 결혼식 사진들이 엄마가 아프면서 찢긴 마음들이었을 거다.
하루는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엄마가 왜 옛날 사진 잘 안 보는 줄 아냐고. 아들 졸업식 한 번을 챙긴 적이 없어서. 그 사진 하나 너한테 안겨주지 못한 게 한스러워서 그렇다고 술기운을 빌어 얘기했다. 내 유년 시절 몇 번의 졸업식 동안 난 가족을 본 적이 없다. 유치원 때도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엄마는 오지 못했다. 아프고 아파서 그랬다. 그러니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도 크다 했다. 아내 손잡고 아들 졸업식 찾아가자 한 번을 말한 적 없는 남편이라면서. 그런데 엄마. 그건 괜찮아. 내가 대답했다. 난 엄마를 닮아서 인복이 많다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나를 잘 챙겨줘서 엄마 아들은 아무렇지 않다고. 고등학교 때는 은진이 어머니가 나 챙겨주셨는데 정말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고. 차를 타고 학교 주변을 지나는데 경치 좋은 공원이 하나 보이는 거야. 그런데 거기서 은진이 어머니가 여기서 영정사진 찍으면 예쁘게 나올 것 같은데 여기서 하나 찍고 가는 게 어떻겠냐 그러시는 거야. 뒷좌석에서 은진이랑 나랑 한참 웃었잖아. 참 유쾌하시다고. 그래서 은진이도 저렇게 유쾌하구나 생각했어. 매번 혼자인 졸업식이었지만 그래도 매번 울지 않고 잘 웃었어. 그러니까 엄마. 미안해하지 말라고. 재잘거렸다. 그날도 다시 한번 재잘거렸다.
몇 시간이 흘러도 엄마의 숨은 일정했는데 그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마른 숨을 내쉬던 엄마의 목에 침이 고이면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르릉. 가르릉.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예쁜 이야기를 많이 많이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소리는 점점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 소리의 고통에 시달리다 한 시간가량은 귀를 틀어막고 앉아있기도 했다. 중간중간 들어오는 간호사에게 이 숨소리를 멈추게 해달라 호소해 보았지만 호스로 침을 몇 차례 빼는 방법만이 전부라 했다. 호스로 침을 뺄 때마다 엄마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무엇이 덜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는 그 순간에 나는 계속해서 결단을 내리고 번복하고. 빼지 말자. 아니. 빼야 해. 빼지 말자. 아니. 빼야 해. 그 시간이 지속될수록 나는 황폐해져갔다. 해가 뜨고 지고 그리고 밤이 찾아오고 더 깊은 새벽이 찾아와서도 숨소리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했다. 가르릉. 가르릉. 가르릉. 나는 그 숨소리에 잠식당해 반쯤 미쳐버렸던 것 같다. 이 핑계 아닌 핑계를 먼저 꺼낸 건 그때부터 너무나도 끔찍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빌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냐고. 고통스럽지 않냐고. 언제까지 이 고통스러운 숨을 쥐고서 생을 이어갈 거냐고. 이모가 그랬다. 너희 엄마는 생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고. 그러고 보면 나는 생의 의지를 모두 엄마에게 맡겼던 것 같다. 의지란 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견딘다거나 버틴다거나 그런 것들이 의지라면 그건 모두 엄마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죽고 싶었다. 엄마도 죽고 나도 죽었으면 했다. 내 의지로 붙들고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건 영화. 어쩌면 영화. 더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나는 영화를 떠올렸다. 비통하게도 그때 내가 떠올린 건 영화 [아무르]였다.
어느 노부부의 끝사랑을 다룬 그 영화였다. 안느와 조르주는 엄마와 나였다. 반신 마비가 찾아온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남편 조르주의 이야기. 그 영화 속 장면에는 엄마와 내가 있었다. 휠체어를 탄 엄마를 데리고 병원을 오가는 내가 있었고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전긍긍해하는 내가 있었고 산책하는 엄마를 부축한 내가 있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고통스러운 가르릉 가르릉 숨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있었다. 처음 1시간 동안의 조르주가 나의 유년 시절이었다면 나중 1시간 동안의 조르주는 나의 지금이었다. 그 안에 아빠의 일생 역시 조르주에게 담겨있을 테지만 그땐 내가 아빠의 장면을 더할 겨를이 없었다. 내 마음대로 편집하고서 기억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한편으로 나는 정말 끔찍한 아들이라 생각했다. 잔인하리만치 악독해진 내가 조르주에 이입된 그 순간 엄마도 죽고 나도 죽었으면 했다. 엄마의 숨이 끊어지길 기다리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안느처럼 괴이한 숨만을 붙들고 있는 엄마를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했다. 병원 창밖이 유난히 시원해 보였다. 뛰어내릴 자신도 없으면서 뛰어내리는 나를 상상했다. 한날한시에 숨을 거두는 엄마와 나를 상상했다. 기이하게도 그러면 엄마가 더 이상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침이 식도에 가득 차올랐는지 그 순간 엄마의 숨이 굉음을 냈다. 나는 급하게 간호사를 호출했고 다시 한번 호스로 엄마의 침을 빼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자정이 지난 그 시간에 엄마의 목 안에서 호스를 빼며 간호사가 말했다.
"어머니가 아들 어버이날에 슬프지 말라고 하루 더 버티시나 보네요."
간호사가 나가고 나서 나는 목놓아 울었다.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2023년 5월 9일
지쳐버린 새벽에 나는 엄마 곁에 엎드려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이제 나에게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엄마의 귀는 살아있다 했으니 이야기할 기력이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흥얼거렸다. 그 음이 어딘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My Favorite Things'와 같아서 스마트폰으로 잠시 노래를 틀었다. 엄마가 들으면 좋을 것 같아 귀에 가까이 대고서 함께 들었다. 어떤 노래든 더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여러 곡 재생했다. 한영애와 심수봉의 노래들, 그리고 이미자와 정훈희의 노래들을 틀었다. 그렇게 수십 곡을 듣다 보니 1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로 밤을 지새우지 못할 만큼,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다 들려주지 못할 만큼 엄마를 몰랐구나 싶어 미안했다. 더 이상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들이 이렇게나 무심하네."
그러다 얼마 전 들은 노래 가사가 하나 떠올랐다. 엄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그 노래 가사. 그 노래를 틀었다.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나를 실수했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엄마. 우리가 그러지 않았을까. 엄마는 매번 다시 태어나도 내 엄마를 하겠다 했으니까. 나를 왜 낳았느냐는 그 잔인한 질문에도 엄마는 너니까라 했으니까. 나는 엄마의 별이었으니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별에 왔을 테니까. 그렇게 윤하의 '별의 조각'이 엄마에게 들려준 마지막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 뒤로 나는 엄마 손을 잡고서 잠시 잠이 들었고 꽃밭에 앉아있는 엄마 꿈을 꾸었다. 젊은 시절 가장 예쁘게 나온 엄마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