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피쉬
9
엄마가 없으니 다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집은 파괴되었고 나는 병실에 혼자 남겨졌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먼저 의사가 찾아와 이영희 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전하였고 숙모는 상조회사에 전화를 걸어 운구차를 보내달라 했다. 장례 절차가 진행되려면 사망진단서가 필요하니 아빠는 간호사에게 물어 원무과로 향했고 이모들은 엄마 짐을 모두 챙겨 병실을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난 잠시 그곳에 서서 집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엄마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무명천과 상조회사 직원들이 끌고 나서는 침상, 분주한 간호사들과 빠르게 정돈되는 병실을. 죽음은 정말 순간이구나 생각했다.
병실을 나설 채비를 마치고 잠시 비상구 계단에 앉아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떠올렸다. 먼저 직장에 걸어야겠지. 아닌가. 친구에게 걸어야 하나. 친구라면 누구. 선뜻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 일 인분의 몫을 해내지 못하는 게 싫어서 직장에 먼저 걸었다. 징조가 있었는지 점장님은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고 스마트폰 너머의 나를 곧바로 읽어낸 뒤 무탈하게 잘 보내드리고 오라 전했다. 지인 모두를 챙길 순 없으니 내 주변을 건너 건너 잘 아는 친구들에게 순차적으로 연락했다. 손가락 하나하나 접어가며 친구들을 헤아렸다. 열 손가락이 접히기 전에 전화는 끝났다. 다시 병동으로 들어선 나에게 얘기도 없이 어딜 다녀왔냐면서 이모가 화를 냈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출발할 거니까 서둘러 내려가야 한단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다시 비상구 계단 쪽으로 향했다. 손을 붙든 이모에게 엘리베이터는 싫으니 계단으로 내려가겠다 했다. 이모는 대신 서두르라 했다. 서두르라고. 왜 그리 서둘러야 하는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서두르겠다 했다. 순례하듯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계단마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잊지 말자 했다. 무명천이 덮인 그때부터 엄마의 표정이 모두 지워진 것만 같아 무서웠다. 벌써부터 엄마가 그리웠다. 한 계단 한 계단 살려내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그때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엄마의 얼굴이 아닌 투박한 손. 엄지와 검지가 살짝 구부러진 그 투박한 손이 가장 많은 계단 칸을 차지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고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들로 붐비는 1층 로비를 지나 병원 정문을 나서며 혼자 속삭였다.
이제 고아야.
겨울잠이 끝나는 3월 경칩에 의사는 더 이상 항암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랬다. 엄마는 마약성분이 들어있는 진통제를 한 아름 받아 퇴원했고 이주 간격이던 진료 예약이 한 달 뒤로 변경됐다. 마음이 시렸는지 엄마는 자꾸만 울었는데 달랠 길이 없어 공항 가는 택시 안에서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추워서 길목에는 꽃 한 송이 보이지 않았다. 꽃이 보였다면 엄마에게 꽃 좀 보라 했을 텐데 참 매정한 날씨였다. 붙잡은 손을 풀던 엄마는 눈물을 숨기려고 한동안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꽃 한 송이야 나타나라. 빌고 또 빌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엄마가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 꽃은 없었다. 공항에 꽃집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탑승장으로 들어선 엄마를 끝까지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미를 샀다. 훗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내려가서라도 그 장미를 전해줄 걸 하고 후회했다. 엄마에게 꽃을 선물한 게 언제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해 내고 싶은데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그만큼 오랜 된 기억일 테고 그만큼 드문 기억일 테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몇 월 며칠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꽃을 선물했다는 문장을 쓸 수 없는 아들이 됐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불변의 문장이 됐다. 속상하니 술이 필요했다. 함께 술을 마셔줄 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쾌히 응해준 영재와 난 평소 즐겨먹던 우럭에 소주잔을 부딪히며 일주일을 회고했다. 직종이 같던 우리는 한 주간 벌어진 사건사고를 나누며 유쾌하게 웃기도 하고 상심하며 한숨 쉬기도 했다. 횟집은 시끌벅적했고 팔딱거리며 생동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취기 어린 우리도 합세해 격동하는 감정과 목소리를 보탰다. 술잔이 잠시 쉬는 틈을 타 가지런히 줄지어 선 초록병을 세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영재는 담배를 피우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한쪽 귀를 막고서 전화를 받았다.
아들. 엄마 집에 잘 도착했어.
응. 엄마. 나도.
아들. 걱정하지 마. 알았지.
엄마도. 엄마도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엄마 걱정 안 해. 피곤할 텐데 일찍 자고.
응. 엄마도.
평소와 같은 짧은 통화였지만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무서워하고 있다는걸. 그 작은 떨림이 내 손끝으로 번졌다. 조물조물 손을 주무르고 있는데 영재가 들어와 춥냐고 물어왔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그때 영재에게 엄마와 함께 꽃구경을 하지 못한 오늘을 해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봄이었으면 좋겠어.
응?
엄마가 떠나는 날은 화사한 봄이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우리 엄마가 꽃을 좋아하거든. 겨울은 싫어해.
많이 안 좋으셔?
꽃이 많이 피었으면 좋겠어.
나를 대신해 영재가 한참을 울었고 우리는 다시 술을 마셨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완연한 봄이었다. 맑고 따듯한 봄. 하늘에게 감사했다. 그때 보여주지 못한 꽃 한 송이를 대신해 엄마 가는 길에 세상은 꽃으로 덮여있었다. 차창 밖으로 만개한 꽃들을 보며 엄마가 무척 좋아하겠다고 혼자 속삭였다. 엄마는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봄꽃을 모두 보았을까. 3월에 피어난 목련과 진달래를, 그리고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개나리를. 지금도 보고 있을까. 화사하게 핀 5월의 유채꽃과 영산홍을. 그 어느 때보다 화창한 이 봄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