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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22. 2024

아들

마미




11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엄마는 이런 말을 했어.

꽃이 참 예쁘다고 _


봄날의 꽃 같던 엄마는 그렇게

꽃이 되었고 _


난 예나 지금이나 봄이면 우울해

그토록 예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우울해 _





노란 개나리를 보면서 엄마는 계속 예쁘다는 말을 반복했고 나는 봄날의 꽃을 보면 우울하다 말했어. 그랬더니 엄마가 말했지. 우리 아들은 꽃이 빨리 지니까 그게 싫어서 우울한가 보네. 너무 착해서 그래. 너무 착해서. 그런데 엄마 그거 알아. 나 하나도 안 착해. 그냥 항상 착한 척하고 있을 뿐이야.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내가 얼마나 끔찍한 생각을 했었는지 모를 거야. 그냥 이 모든 순간이 어서 끝나기를. 언젠가 끝나겠지. 이토록 힘겨운 나날이 언젠가 끝나겠지. 그런 생각을 했어. 엄마를 조금씩 삼키고 있던 그 암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난 이미 알고 있었어. 포기. 그래. 어쩌면 난 이미 그때 엄마를 포기했던 거야.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착하다고. 그저 착하다고 그렇게 얘기했지. 그리고 또 얘기했지. 사랑하는 우리 아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와 난 좀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아. 다른 엄마와 아들보다. 안부를 물으려 매일같이 통화하던 버릇도,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던 몇몇 사건도,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너무나 애틋했던 엄마와 아들이란 호칭도 남들과는 달랐던 것 같아. 어쩌면 엄마는 내 반평생의 엄마이자 연인이자 여자였던 것 같아. 그만큼이나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고 엄마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고 엄마의 꿈을 안아주고 싶었어.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금에서야 난 엄마의 꿈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지만 알 수가 없지. 이제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래도 엄마는 평소에 얘기했어. 내가 엄마의 꿈이었다고.


그런데 엄마. 난 그 무엇도 이루어주지 못한 아들로 생이 끝나버렸어. 엄마의 숨이 끊어진 그날 아들의 생도 끊어졌지. 난 이제 아들에서 잠깐의 미아였다 다시 겨우 아들이 되었는데 이제는 천애고아가 되었어. 내가 엄마의 꿈이었다고는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얘기했어. 언젠가 내가 꿈을 이룬 모습을 보고 싶고 다 큰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고 훗날 내가 결혼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나와 닮은 아들을 낳아 아빠가 된 내 모습도 보고 싶다고. 어쩌면 그건 내 평생 이룰 수 없는 것들이어서 엄마 살아생전에도 이루지 못했나 봐.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이었다 한들 서로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랑은 아니었나 봐.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


엄마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때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어. 그래서 혼자 일도 하고 밥도 먹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그랬어. 그런데 이제 엄마가 없으니까 전화를 걸 곳이 없어. 매일같이 전화를 걸던 일이 이제 나의 시간에서 사라져버렸어.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루가 온통 엄마로 시작해 엄마로 끝난 적도 있어. 허공에 엄마를 부르다 울다 그렇게 지쳐 잠들다 뭐 그런 나날들이 한둘이 아니야. 요즘도 그렇고. 그래서 요즘 나의 시간에는 전화도 다짐도 글도 꿈도 다 사라져버렸어. 그냥 온통 엄마야. 엄마가 없어서 내 마음은 공허해. 그 허기를 달랠 길이 없잖아. 그래서 온통 엄마를 그리다 하루를 끝내나 봐.


오랜만에 영화 [마미]를 봤어. 제목은 엄마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아들이었지. 철부지 아들. 고단한 엄마의 생은 아들이 전부야. 사고 치는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디안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엄마와 많이 닮은 것 같아. 촌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나팔바지를 입은 모습에서, 좌절한 순간 마스카라가 번지도록 우는 모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서 난 엄마를 봐. 엄마. 그래도 난 스티브처럼 엄마를 못살게 구는 아들은 아니었잖아. 난 태생부터가 과격함이란 모르고 살았던 유약한 아들이었으니까. 그렇지. 엄마가 일하러 가면 보고 싶다고 눈물이나 흘렸던 그런 울보 정도였지. 그럼 엄마는 항상 나에게 돌아왔지. 아들에게로. 엄마는 그렇게 포기란 모르고 살았던 투사였어.


엄마가 디안과 무척 닮았다 생각한 장면이 하나 더 있어. 자신의 아들이 곤경에 처하자 달려들던 그 모습. 그 누구보다 여리고 우아하던 엄마. 엄마는 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여리지도 그렇게 우아하지도 않았지. 오히려 투박하고 과감했어. 그 어떤 것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게 나를 지켜주려 했지. 하루는 나를 호통치던 아저씨에게 무섭게 달려들기도 했고 내 꿈을 모독하던 친인척들을 단호하게 내치기도 했어. 그래서 가끔 생각해. 마트에서 손목을 긋고 누워있는 스티브를 보며 결국 나도 철부지 아들이었구나. 엄마는 나를 항상 지켜주고 있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그저 살기 싫다는 일기만 수두룩하게 쓰던 학생이었으니까. 엄마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저 혼자였던 내 삶을 지탱하느라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하던 철부지 아들이었구나. 그래. 의젓하다고. 아니. 전혀. 난 그런 아들이 아니었어. 스티브와 다를 바 없지. 엄마는 끝까지 나를 지켜주고 사랑했는데. 끝까지.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너를 더 많이 사랑할 거야.

넌 갈수록 엄마를 덜 사랑하겠지만.


그런데 엄마. 엄마가 모르는 게 하나 있더라. 이렇게 엄마 떠나고 나면 아들의 그리움은 엄마가 아들에게 주던 사랑보다 더 크게 찾아온다는 거. 이제 사랑이 떠난 자리에 그리움만 남아 그것이 나를 집어삼키도록 하는 일 밖에는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어. 엄마는 이 그리움을 모른 채 떠나서 다행이라고. 그러니까 이게 아들의 몫이라고. 시간이 갈수록 엄마가 더 많은 사랑을 아들에게 준 것처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더해가는 것이 아들의 몫이라고. 난 아마 남은 생동안 그러고 있을 거야.


영화 [마미]를 볼 때마다 울어. 그 장면을 보며 울어. 디안이 꿈꾸던 삶. 그 삶을 보면서 울어. 아들이 자라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 성공을 하고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엄마가 바라던 모습대로 그리고 아들이 바라던 모습대로 어른이 되어 집을 나서고 다시 돌아와 엄마를 안아주고 그리고 아들의 아들을 안겨주고. 그런 삶. 그런 꿈. 그런 사랑. 그런 관계. 내가 안겨주지 못한 엄마의 꿈. 애초에 난 그 꿈을 안겨주기 힘들 것 같다고 아픈 엄마에게 말했지. 잔인했지. 어쩜 그리 잔인했을까. 나란 사람. 사람도 아니야. 엄마. 미안해. 그냥 따듯하게 안아주고 웃어주면 됐을걸. 왜 나는 그리 잔인하게 엄마의 꿈을 단칼에 잘라내버렸을까.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말이야. 내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 지금 이 순간도 난 디안의 꿈을 보면서 엄마를 떠올리며 울어. 엄마도 저런 예쁜 꿈을, 아주 포근한 꿈을 떠올리며 잠들었을 텐데. 

영화 끝에 디안은 다시 스티브를 가두기로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병마와 싸우기 위해 오랜 시간 내 곁을 떠나있던 엄마의 마음처럼 아들을 포기한 게 아니라 희망 때문에. 스티브를 거기 맡긴 건 희망 때문이라 말한 디안의 마음을 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아. 골목에 앉아 엄마는 나에게 말했었지. 엄마가 잠깐 멀리 가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아들은 엄마를 의젓하게 기다려주면 된다고. 그때도 역시 엄마는 암과 싸웠고 이겨냈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에게 돌아왔지. 그러니까 디안도 분명 다시 스티브를 만날 날을 고대하며 그곳으로 데려간 것일 테고. 난 알아. 겪어봐서 알아. 


스티브를 거기 맡긴 건 희망이 있어서야

나는 희망에 차 있거든


언제나 나라는 희망에 차 있던 엄마.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꽃을 보며 희망에 차 있던 엄마를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겠지. 그래도 살아볼게. 엄마. 엄마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나를 포기하진 않으려 노력해 볼게. 엄마가 나에게 준 희망을 져버리지 않을 거야. 나에게 준 사랑을 져버리지 않을 거야. 엄마.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 걸을 수 있어

Feet don't fail m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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