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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21. 2024

배웅

노매드랜드




10

결혼식은 부모의 지인들이 자리를 빛내고

장례식은 자식의 지인들이 자리를 채운다고

누가 그랬다






배웅


장례는 기독교식 불교식이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하시겠어요. 

엄마는 율리안나다. 나 세례식 때 받은 세례명은 비오였고 엄마는 율리안나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며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여자라는 의미를 지녔단다. 독실한 천주교인는 아니었지만 엄마는 일요일이면 성당에 다녔고 신부님과 수녀님이 엄마를 위해 기도하겠다 그랬다. 아프고부터 엄마는 이모들을 따라 절에 다녔다 한다. 절에 다닌 엄마를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전화로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아들 하는 일 잘 되라고 치성을 드리고 왔다 얘기하기도 했고 절밥을 먹었는데 입에 맞는다며 사찰음식 책을 하나 사다 달라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율리안나로 생을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십자가에 입맞춤하고 성호를 긋고 사도신경을 읊조리는 엄마의 모습이 좋았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교리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은 없지만 엄마가 항상 읊조리던 이 첫 문장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기독교식이요.


서울이모는 불교신자였다. 엄마가 첫째고 서울이모가 둘째다. 서울이모는 엄마를 위해 절에서 치성을 드린다 했다. 내가 엄마에게 갈 수 없을 때면 서울이모와 이모부가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진료 예약부터 입원실 확보까지 모두 두 분의 도움이 컸다. 특히 이모부가 엄마를 끔찍이 아꼈다. 제주에서 담낭암 판정을 받고 살 날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자 이모부는 당장 서울로 모셔오라 호통을 치셨고 경희의료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6개월은 12개월로 더 나아가 2년으로 늘어갔고 엄마의 항암치료는 40차를 넘겼다. 엄마와 함께했던 마지막 1년은 어쩌면 이모부가 나에게 준 커다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모부와 마주칠 때면 항상 감사하단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 항암치료받을 때는 절에 다니셨어. 훈아.

그래. 숙모도 엄마 모시고 절에 다녀오기도 했어.

나에게 엄마는 천주교인이었지만 동생들에게 언니는 불자였나 보다. 고민이 됐다. 상조회사 직원분은 천천히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고 조급해 보이는 이모들은 불교식으로 치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따지고 보면 나는 짝퉁 신자였고 이모들은 독실했으니 불교식으로 하는 게 엄마를 기리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을 번복했다. 종교 형식을 선택하고 나니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식장의 크기를 정했고 다음으로 상복을 정했다. 조문객이 많지 않을 것을 감안해 최소한의 크기와 비율로 차근차근 선택지를 작성했고 뭐가 뭔지도 모를 절차들은 상조회사 직원분이 알아서 잘 택해주셨다. 마지막으로 봉안당에 안치할 엄마의 유골함이 남았다. 장례식장 뒤편에 매점 옆으로 다른 상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각양각색의 장례용품을 팔고 있었다. 거기서 아빠와 나는 엄마의 유골함을 정해야 했다. 나무함들은 환경에 따라 유골이 부패할 수 있어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자기함 중에서 어머니 취향에 맞게끔 디자인을 선택하는 게 좋다고 장례지도사가 알려 주었다. 소나무 아래 송학이 쉬고 있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하나 있었고 분홍 들꽃이 소풍을 나온듯한 화사한 문양도 있었다. 가격이 오를수록 그림은 우아미가 넘쳤고 자기틀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유골함에서까지 빈부의 격차가 드러나는 세상이라니. 무엇이든 좋은 걸 해주고 싶은 게 자식의 마음이거늘 장삿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상점이 끔찍이도 싫었다.

비싼 거 말고 어머님이 좋아하실 만한 걸 고르세요. 그게 정말 좋은 겁니다.


오늘 처음 본 장례지도사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부모 잃은 자식들을 봐왔을까.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마음에 미풍이 일었다. 따듯한 바람이었다. 비싼 거 말고 좋은 거. 그게 정말 좋은 거. 안광이 비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못 봤다던 엄마의 말처럼 장례지도사의 눈에도 안광이 비쳤다. 빛을 따르기로 했다. 창으로부터 따스한 빛을 받고 있는 유골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떨기 모란꽃이 소박하게 내려앉은 문양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었고 아빠와 이모도 좋다 그랬다. 장례 절차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엄마를 보낼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는 상조회사에서 가져다준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입고 온 그대로 엄마를 모실 생각이었다. 검정 하프넥에 검정 재킷, 검정 슬렉스를 입고 내려왔던 나는 엄마가 보기에 아주 듬직하고 단정해 보이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 나를 장례지도사가 설득했다. 장례절차가 끝나면 옷이 많이 상할 테고 식장에서 입었던 옷 밖으로 가져가는 거 아니라며 갈아입으라 청했다. 엄마도 그러라고 할 것 같았다. 엄마는 옷을 무척이나 아끼던 사람이었으니 그래야겠다 생각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식장에 앉아 엄마의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숙모가 고른 사진이었는데 엄마는 은빛 퍼가 달린 보라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젊었을 때 따스한 계절에 노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쓰고 싶었다. 그래도 숙모가 고른 사진도 좋았다. 엄마는 아픈 기색 없이 붉은 장미처럼 화사한 입술로 슬쩍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그걸로 됐다 생각했다. 친구들 대부분 서울에서 내려와야 하는 터라 오늘은 조문객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신영이와 선희가 찾아와줬다. 3일 내내 오겠다는 친구들을 한 번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어서어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정말 3일 내내 찾아와주었다.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떠나보낸 신영이는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었고 이제 엄마가 된 선희는 살뜰하게 내 마음을 챙겨주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고 자란 친구들이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한 위안이 서로 간에 깊게 깔려있었다. 매일매일 잠깐잠깐의 신영이와 선희가 없었더라면 내 손과 다리와 눈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거라고 3일장 내내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슬픔보다 감사로 채워진 장례식에 엄마도 기뻐했을 거다. 그렇게 엄마를 기리는 첫날은 고즈넉하게 흘러갔다.


결혼식은 부모의 지인들이 자리를 빛내고 장례식은 자식의 지인들이 자리를 채운다고 누가 그랬다. 고요한 식장이어서 엄마가 슬퍼할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혼잣말로 그리 떠들었나 보다. 엄마. 엄마는 나만 있으면 되지. 대신 내가 꼼짝도 안 하고 엄마 곁을 지킬 거야. 몇 번을 되뇌는데 서울에서 첫 조문객이 찾아왔다. 수연이었다. 일하면서 만난 수연이는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된 사이였지만 우리는 그 얼마 안 된 사이에 많은 사연을 공유했다. 우리 엄마 이야기를 시작으로 수연이 할머니 이야기, 수연이의 퇴사와 결혼, 명절마다 주고받은 음식들과 서로 좋아하는 책들, 웃음과 눈물, 상처와 신뢰까지 공유했다. 조심조심 빈소로 들어선 수연이는 나를 보고 울상을 짓더니 어떻게 인사드리면 되냐 물었다. 절을 해도 되고 묵례를 해도 된다 하니 묵례를 했다. 내 또래들은 아직 문상에 익숙한 세대들이 아니라 그런지 어색함이 묻어났다. 수연이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다. 그런 와중에도 수연이는 내 걱정을 많이 했는지 수척해 보이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그만 울자며 수연이를 토닥이다 서로의 얼굴이 가관인지라 같이 웃기도 했다. 그때 급하게 장례지도사가 입관 일정을 알려왔다. 드디어 그 시간이라고. 다가오지 말았으면 하는 그 시간이 다가왔다고 하니 두 손이 떨려왔다. 수연이는 내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는 자기가 여기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 했다. 


입관식에 들어가기 전 장례지도사는 진중하게 절차를 설명했다. 기억에 남는 건 울되 너무 많이 울어선 안되고 절대 시신에 눈물을 떨어뜨려선 안된다는 거였다. 떠날 채비를 마친 엄마를 보며 예쁘게 웃어주자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될 리가 없다. 문이 열리고 줄지어 들어선 친척들 사이에서 벌써부터 곡소리가 들려왔다. 장례식에서도 웃을 일이 생기는 것처럼 입관식에서조차 다툴 일은 생긴다. 절차상 예법을 중시하던 윗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따르지 못하는 몇몇 아랫사람들을 꾸짖었고 엄숙해야 할 입관식은 세대 간 탓을 돌리는 일로 수선스러웠다. 개의치 않았다. 나는 노란 개나리색 눈 화장을 한 아리따운 엄마 얼굴을 눈에 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으니까. 봉숭아꽃처럼 산뜻한 입술색 덕분인지 얼굴도 참 맑게 빛났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수의를 입고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엄마는 평온해 보였다. 눈물이 차올라 엄마의 모습이 흐릿해졌을 즘에 장례지도사가 마지막 인사를 하라 했다. 나의 마지막 인사는,

엄마가 머물렀던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걷지 말고 꼭 달려가.


엄마는 분명 달리고 있겠지. 잘 걷지 못하던 엄마는 달리고 싶다 했다. 그래서 엄마가 달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되감았다. 소나기와 같은 눈물이 스쳐 지난 뒤 나는 다시 엄마의 빈소를 지켰다. 지키는 동안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먼 서울에서 여기 제주까지 내려와준 친구들이 자리를 채워줬다. 지금까지 내 직업은 크게 세 번 바뀌었는데 한번은 극장이었고 한번은 서점이었고 한번은 카페였다. 먼저 카페에서 인연이 닿은 친구들이 와주었다. 모르는 거 다 알려주는 도라에몽 같은 승헌이와 겉은 바삭해 보여도 속은 촉촉한 은선이가 자리했다. 이어서 가장 오랜 세월 함께한 극장 친구들이 와주었다. 영혼의 대화 상대일 정도로 통하는 수민누나와 초롱초롱하고 강단 있는 진경이, 철부지스럽지만 속정 있는 재윤이와 매번 나를 먼저 찾아주는 희선이가 자리했다. 이어서 서점에서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와주었다. 알게 모르게 내가 많이 의지하는 보현누나와 엉뚱하지만 척척박사인 윤우, 우직한 나무 같기도 유연한 풀잎 같기도 한 정준이형과 신의가 두텁고 공명정대한 효진이가 자리했다. 밤늦게는 대학 시절 내가 일호 팬을 자처한 가빈이와 내가 인정한 노력형 천재인 미경이가 자리했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대표하여 승호와 정재, 정혁이와 일용이도 자리해 주었다. 모두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한다.


세상구경을 떠난 딸을 대신에 빈소를 찾아준 은진이 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전하고 싶다. 홀로 자리해 내 슬픔을 오랜 시간 거둬주신 은진이 어머니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끼니도 잊고 빈소를 지키는 와중에 은진이 어머니가 찾아주어 따듯한 밥 한 끼 꼭꼭 씹어 삼킬 수 있었고 담담하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신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일화처럼 은진이 어머니의 기억은 여전히 내 속을 달래고 풀어주고 있다. 


소소하지만 온정 어린 일화도 하나 있다. 그건 선우, 그리고 진우에 대한 일화인데 지금 떠올려 보니 그 마음이 참 다정다감하여 남겨본다. 조문객이 끊긴 저녁 무렵에 선우가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공항이 장례식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니 금방 오겠다 싶어 나는 숙모에게 두 사람 분량의 식사가 남아있는지 물어본 뒤 빈소에 앉아 선우와 진우를 기다렸다. 선우는 내 세 번의 직장 생활 중에서도 두 번의 직장 생활을 함께 한 동생인데 동생이기보다는 벗에 가까운 관계였다. 어떨 때는 선우가 나보다 어른스럽게 형 노릇을 하기도 했으니 나 역시 동생보다는 친구처럼 선우를 대했다. 향이 하나 거의 탔을 무렵에 선우가 입구 틈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더라. 설마 조의금이 없어 현금인출기를 찾으러 갔나 싶어 그냥 들어와도 된다 말하려고 빈소를 나서는데 진우가 멀뚱히 서서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느라 늦어졌다 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우만 운 게 아니라 진우도 오며 가며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쳤다길래 더 크게 웃었다. 선우가 울고 나오니 진우가 울러 들어갔고 진우가 울고 나오니 다시 선우가 울러 들어갔단다. 문상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둘을 보면서 생각했다. 선우와 진우는 오늘 나에게 가장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일화로 남겠다고.


3일장의 마지막 날. 발인이 남았다. 봉안당으로 엄마를 모시는 길이니 탈이 있어선 안됐다. 그 때문인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엄마의 영정사진과 유골함을 누가 맡을지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마음 같아서는 내가 모두 들고 싶었다. 우리 엄마의 모든 것을 내가 짊어지고 싶었다. 장례지도사가 말하기를 지역마다 그 차이가 상이한데 아드님은 두 손이 묶이면 안 되기 때문에 유골함은 엄마와 가장 가까운 동생분이 들면 좋겠다 하였고 영정사진은 본디 아들의 자식이 들어야 하는데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가까운 친인척들 중에 엄마와 정분이 두터운 사람이 드는 게 좋겠다 했다. 그래서 영정사진은 평소 엄마가 예뻐하고 엄마를 잘 따르던 숙모가 들기로 했다. 영정사진을 든 사람은 가는 길에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에 숙모가 많이 긴장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엄마를 모실 수 있어 좋다며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영정사진을 사려 깊게 챙겨준 숙모에게 큰 빚을 지었으니 찬찬히 갚아나가기로 했다. 문제는 유골함이었다. 장례지도사는 엄마의 바로 아래 동생인 서울이모가 들어주었으면 했다. 당시 서울이모는 어깨 통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터라 무리가 가는 행동을 해선 안된다 했고 솔직하게는 두렵고 무섭다 했다. 행여 걷다 다리를 헛디뎌 유골함을 깨뜨릴까 두렵다 했고 봉안당으로 향하는 길이 무섭다 했다. 이어 정은이모는 언닌데 뭐가 무섭냐며 서운하다 울부짖었고, 이모의 일생이 걸린 법원 문제로 봉안당에 함께 가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스럽고 죄스럽다며 가슴을 내리쳤다. 엄마에게는 여섯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아 쓸쓸했다. 그 씁쓸한 쓸쓸함에 넘어지기 싫어서 나는 장례지도사에게 아들인 내가 들면 정말 안 되는 것이냐 물었다. 장례지도사는 따듯한 손으로 내 등을 여러 차례 쓸어내리고는 어머님께서 아무래도 그걸 원하시는 것 같으니 그리하자 했다. 이모들 모두 그게 좋겠다 했다. 정말 그랬나 보다. 아무래도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 온기를 머금고 떠나고 싶었나 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봄꽃내음이 살짝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기분이 들었다. 말을 해선 안된다 하기에 속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잘 달리고 있는지. 숨이 찰 정도로 달리지 말고 기분 좋게 상쾌할 정도로만 달리라 했고 그러면 엄마는 꽃구경하느라 잠시 서있다고 그랬다. 서로의 손은 여전히 따듯한지 묻기도 했고 우리 둘 다 눈물이 많아서 큰일이라며 다음을 걱정하기도 했다. 발인식 동안 우리는 한동안 나누지 못한 통화를 아쉬워하며 크고 작은 감정들을 많이도 나누었고 화장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녕을 고했다. 엄마는 잘 있으라 했고 아들은 잘 가라 했다.


화장장의 순서가 다가오는 동안 엄마를 위해 묵념했다. 순서는 빠르게 찾아왔고 장례지도사는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하는 절차를 신중히 알려주었다. 관이 타기 직전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 그랬다. 그래야 훨훨 날아갈 수 있다 그랬다. 불길이 타올랐고 이모들과 함께 크게 외쳤다.

언니. 빨리 나가. 엄마. 빨리 나가.

엄마가 한 줌 흙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영화 한 편의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영희는 극장을 나섰다.

엄마의 한 칸은 들꽃이 핀 창가 자리 옆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엄마에게 시를 읊었다.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펀이 사랑하는 이에게 낭송했다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그댄 여름보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꽃봉오리를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때로 하늘의 눈은 너무나 뜨겁게 빛나고

그 황금빛 얼굴은 번번이 흐려진다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히 혹은 자연의 변화로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그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맨다 자랑 못하리

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사람이 숨을 쉬고 눈이 보이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_ 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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