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13
한 달 후 일 년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조제가 말했다 _
언젠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거라고
그리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라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질 거라고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갈 거라고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조제는
그렇게 말했다 _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났다
아무래도 난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저 고독하기만 하다 _
콩국수
엄마가 해준 음식들은 모두 할 수 있다고 _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프고부터 김치를 사서 먹기 시작했다. 아픈 엄마에게 김치가 떨어졌단 말을 하기도 그래서. 그래서 김치를 사 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엄마의 김치를 맛보지 못했지만 이젠 익숙하다. 그런데 전복죽이. 제주에 내려가면 엄마가 해주던 전복죽이 너무 그립다.
항암치료의 끝자락. 엄마는 통원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병원에 오래 있는 걸 싫어했다. 하긴. 짧고도 긴 생동안 엄마는 병원에 머물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곳에 오래 있기 싫었겠지. 나 역시 병원은 싫다. 엄마의 휠체어를 끌며 오가던 그 긴긴 병원의 복도도, 나를 안아주고 어서 가라며 손짓하던 입원실도 너무나 싫다. 다만 그토록 차갑고 딱딱하고 서슬 퍼런 병원에서 내가 좋았던 한 가지는 엄마의 따듯한 손을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잡고 있을 수 있었던 거. 엄마의 손은 너무나도 따듯해서 가끔은 밥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집밥이야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잘 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단련된 나는 엄마보다 김밥도 잘 말고 국도 잘 끓이고 볶음밥도 잘 볶고 그랬다. 그래도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요리들이 있었는데 말려서 찐 삼치라든가 전복죽이라든가 꽃게탕은 그 어떤 식당에서 먹어도 엄마의 맛이 나질 않았다. 그것만큼은 엄마가 최고라고 항상 말해왔다. 그래서 난 제주에 내려갈 때면 항상 먹고 싶은 게 같았다. 그리고 엄마는 매번 같은 요리를 해주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시장에 가서 좋은 전복과 꽃게를 골라잡던 엄마는 내가 집에 내려와 있을 때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했다. 그저 잘 먹고 가면 된다고 계속해서 맛있는 걸 해주었다. 대부분 첫날은 꽃게탕이었고 마지막 날은 전복죽이었다. 또 전복죽이냐 툴툴거리다가도 가스레인지 앞에 한참을 서있어 땀이 흥건하던 엄마의 얼굴을 보면 괜스레 미안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웃던 엄마. 천천히 먹으라며 계속해서 내 얼굴을 주시하던 엄마. 나는 왜 그때 엄마에게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무슨 또 죽을 끓였어'라 말을 했을까. 어쩔 수 없는 아들이라. 나도 결국은 엄마의 아들이라 그랬나 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엄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그 문어죽. 이상하게도 엄마는 그날 전복죽이 아닌 문어죽을 끓였다. 항암치료가 중단된 상황. 날이 갈수록 엄마의 몸은 연약해졌고 정신도 물러졌다. 이제 더 이상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게 됐을 때 나는 엄마를 만나러 제주로 갔다. 잠깐의 휴가였지만 한동안 엄마를 보지 못해 걱정되기도 했고 또 겸사겸사 아빠와 이모에게도 인사를 해야 할 시기였으니까. 은은한 봄의 첫 자락. 그때 난 콩국수가 먹고 싶어 엄마에게 콩국수를 해달라 했다. 이번에는 꽃게탕도 전복죽도 말고 콩국수를 해달라고. 콩국수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엄마는 집에 어서 오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막상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역시나 꽃게탕을 끓이고 있었고 콩국수는 내일 먹으면 된다고 얼버무리며 배시시 웃었다. 새침하게 노려보다가도 웃는 엄마의 얼굴이 예뻐서 알겠다 말하고는 선풍기 앞에 앉아 그 뜨거운 꽃게탕을 남김없이 비웠다. 엄마도 함께 먹었으면 했는데 아프고부터 엄마는 집에서 나와 밥을 먹지 않았다. 내가 다 먹고 난 뒤에 먹거나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먼저 먹었다. 행여 당신의 아픔이 나에게로 번질까 봐. 엄마는 매번 그릇도 수저도 물잔도 같이 쓰지 못하게 했다. 안 그래도 된다 했지만 엄마는 그저 싫다며 나에게 내 것을 쓰라 말했다. 어쩔 수 없다고. 그래야만 엄마의 마음이 편하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은 아빠가 구워준 삼겹살을 먹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삼겹살 하면 프라이팬에 구워 먹는 냉동삼겹살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아빠 때문인 것 같다고. 냉동실에 삼겹살이 비어있는 꼴을 못 봤다고 말하던 엄마는 매번 '당신이 나 좋아하는 음식을 그렇게 채워뒀으면 이렇게까지 서럽진 않았을 거다'라며 푸념했다. 그러면서도 냉동실에 삼겹살을 채워두던 건 언제나 엄마였다. '느그 아빠는 저거 없음 밥도 안 먹으니 저거라도 채워둬야 한다.' 그렇게 엄마는 제 것보다 남편과 아들의 것으로 냉장고를 두둑하게 채우고 채웠다.
마지막 날까지도 엄마는 콩국수를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엄마는 전복죽 아닌 문어죽을 끓였다. 기운 없을 때 먹으면 좋다면서 문어죽을 끓였다. 당신도 자주 해보던 음식이 아니라 그런가 엄마는 죽을 먹는 내내 입에 맞냐 물었고 나는 계속해서 맛있다 말했다. 그 와중에도 콩국수를 해달라는 내 말은 왜 들어주지 않느냐는 불평도 내뱉으면서 말이다. 콩국수는 여름에 해주겠다고. 여름에 한 번 더 내려오라고 말하던 엄마. 그리고 엄마는 만개한 꽃처럼 봄 끝자락에 내 곁을 떠나버렸다.
문어죽을 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예전처럼 일을 하고 엄마의 입원 날짜를 계산하며 지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엄마의 치료는 더 이상 서울에서 진행되지 않았고 제주 한라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로 나를 달랬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엄마가 해준 그 문어죽의 맛이 입에 맴돌았다. 엄마가 나에게 준 기운이겠지. 그 기운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엄마가 계속해서 상기시켜준 거겠지. 그렇게 엄마의 밥은 이제 두 번 다시는 먹을 수 없는, 세상에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엄마를 보내고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해 먹은 건 콩국수. 해달라고 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해주지 않은 콩국수였다. 집에 앉아 콩국수를 먹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게 뭐라고 엄마는 이것도 안 해주고 가냐고. 누가 문어죽 먹고 싶다 했냐고. 콩국수나 해주지 왜 갑자기 문어죽 같은 걸 해서 이렇게 속상하게 하냐고. 먹는 내내 곁에 없는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해댔다. 엄마 없이 보내는 나의 첫 여름. 지금 이 여름은 나에게 땀 아닌 온통 눈물이다.
한참 동안 잘 먹지 못하던 여름날. 내가 만든 콩국수는 엄마에게도 눈물이겠지.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나 많은 땀을 흘리며 해주던 문어죽과 전복죽은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나의 집밥이겠지. 오늘따라 유난히 엄마의 전복죽이 더 먹고 싶은 건 결코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손맛이,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엄마의 온기가, 손에 가득하던 엄마의 온기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겠지. 그래서 엄마. 이제 더는 전복죽은 먹지 못할 것 같아.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엄마의 정성이 깃들었던 그 전복죽을 이제 나는 그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울기만 할 테니까.
별일 없이 사는 요즘에는,
특별한 음식이랄 게 없다.
그저 허기를 달래면 그뿐 _
엄마가 해준 음식들은 모두 할 수 있다고 _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엄마의 음식이라고는
끝내 해주지 않고 떠난 콩국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제비
몇 년 동안 나의 일상은 대부분 회사, 병원, 집이었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고 병원에서는 엄마를 간호하고 집에서는 술을 마셨다. 일이 힘들어서 집에서 술을 마셨고 엄마 걱정에 집에서 술을 마셨다. 이젠 엄마를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안주는 최대한 간단한 걸로. 편의점에서 냉동식품을 사거나 과자를 사 와서 먹은 게 전부. 그나마 배달음식을 시킬 때면 끼니라도 해결하며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게 집에서 하는 일 전부가 되어버린 어느 날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편의점 도시락 비닐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만신창이구나 생각했다. 만신창이. 난 만신창이었다.
엄마의 암 투병을 위해 나를 다잡기로 했던 몇 년간 좋은 습관을 많이 길러두었다. 매일같이 쓰던 일기가 증거고 기초 체력을 기른답시고 홈트와 조깅을 하며 스티커로 하나하나 체크를 해둔 리스트가 증거다. 하지만 몇 달, 몇 년이 흐르고 아들의 생이 끝나버린 지금 난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매번 술로 나를 달랬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요리를 했다. 뭐든 해먹자며 파스타와 튀김, 알탕과 바지락술찜을 만들어 안주로 곁들였다. 집을 술집처럼 만들어 술을 마셨다. 그마저도 지쳤는지 이제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집은 술 한 잔에 엄마를 애도하는 분향소가 되었다. 추모의 집이 되었다.
하루는 안주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틀었다. 추운 겨울. 고향으로 내려간 혜원이 가장 먼저 해 먹은 음식은 배추 된장국과 흰쌀밥이다. 배고파서 고향에 내려갔다는 혜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 역시 배가 고팠다. 홀로 집에 남겨져 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알배기 배추로 된장국을 끓여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혼자여도 따듯한 밥이 있는 집. 나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다. 혼자여도 좋았다.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걸 아주 좋아하던 아이였으니까. 서울로 상경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나의 작은 원룸들에서 역시 든든하게 배를 채워갔다.
나는 집에서 즐거웠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친구도 초대하고 요리도 하고 밥도 먹으며 든든하게 집을 채워갔다. 혜원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본가로 내려가 몸과 마음을 추슬렀지만 나는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래서 혜원이 추울 때 생각난다던 수제비를 끓였다. 온기도 허기도 채워지지 않던 집에 보글보글 거리는 따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술 한 잔이 생각났지만 오늘만큼은 참아보기로 했다. 맛있게 수제비를 먹던 혜원처럼 나도 맛있게 수제비를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할 수 있다.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을 난 이미 엄마에게 배워왔다. 엄마가 없어도 엄마가 준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시간은 절대 멈추는 법이 없고 기억은 자꾸 흐릿해져만 간다. 보고 느낀 것들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어떡해서든 예쁘게 붙잡아둬야 한다. 한동안 볼품없이 그 순간들을 놓쳐버렸으니 서두르자. 빠르게 더 빠르게 하지만 예쁘고 예쁘게 적기로 한다. 희미해져가는 엄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