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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26. 2024

순간

스틸 앨리스




15

선생님이 나비는 오래 못 산다 셨어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했더니

나비는 멋진 삶을 살아서 괜찮다 셨어

아주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 영화 [스틸 앨리스] _ 앨리스




작년부터 영화를 보면 내 삶과의 접점을 찾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드라마든 판타지든 상관없이 나와 연결된 요소를 하나라도 찾게 된다면 영화에 푹 빠져들어 주인공의 삶을 공감하고 동경하고 한편으론 질투하고 또 한편으론 사랑하게 되는데 영화 [스틸 앨리스]는 나보다 엄마가, 우리 엄마가 봤다면 공감했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글씨를 잘 못 쓰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나 어렸을 때부터 이름을 써야 하거나 서명할 일이 생기면 글씨는 아들이 잘 쓰니 아들이 쓰라 그랬다. 글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나에게 떠넘긴 엄마는 글씨를 잘 못쓴다는 핑계를 자주 대곤 했는데 사실은 맞춤법이 문제였다. 이름 정도야 투박하게 또박또박 잘 쓰곤 했지만 엄마는 그것조차 자신이 없었는지 항상 당신의 이름을 나에게 맡겼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엄마는 줄줄이 딸린 아래 동생들 보살피랴 양보하랴 자신의 유년 시절에 배움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꼭 대학에 가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난 대학을 가긴 했지만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해 졸업을 하진 못했고 엄마는 내내 그것이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나 보다. 과거를 돌이켜봤을 때 대학은 좋은 기회였지만 분명 사회에서 다른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좋아하던 나는 배움에 시달리기보다 즐거운 독서에 매달렸고 엄마는 내가 들려주는 고전을 곧잘 새겨들어 좋은 얘깃거리를 많이 늘려 갔다. '아들이 그러던데'로 시작하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의 새로운 버전을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재잘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정말 인텔리하다고.


영화 [스틸 앨리스] 속 앨리스의 삶은 엄마와 정반대로 흘러간다. 그녀는 콜롬비아 대학의 언어학 교수이며 삼 남매를 둔 엄마이자 자상한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다. 부족함 없이 자산을 관리해온 덕분에 자신의 질병을 케어할 방안을 여럿 마련해두었다. 전문 의료진과의 상담을 시작으로 도심에서 떨어진 별장에서 요양하며 시설 좋은 재활원을 미리 둘러보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최후의 수단까지 확보한다. 앨리스는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알츠하이머를 버티며 사랑하는 가족의 도움으로 순간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엄마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와 앨리스가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여럿 보인다.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공부를 하는 장면들이 그러하고 신체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이 일찍 찾아오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강의를 진행하는데 문제가 생긴 앨리스는 학과장에게 자신의 질병을 고백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게 된 앨리스는 점점 자신의 사회적 쓸모를 잃어가게 되고 알츠하이머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싸우는 병마가 다르긴 해도 그런 모습들에는 엄마가 서려있다. 매일같이 건강도서를 찾아보던 엄마는 식이요법과 자가 치료에 관련된 주요 문장들을 일목요연하게 투박한 손글씨로 정리했고 시간 날 때마다 공원으로 걷기 운동을 나섰다. 파킨슨병의 진행으로 걷기에 지장이 생기자 생계유지를 위해 다니던 식당 일을 그만두게 됐는데, 그 뒤로 엄마의 바운더리는 점점 좁혀져만 갔다. 산속 깊은 곳에서 고사리를 꺾어오고 바닷가 주변에서 보말을 주워오던 활동과 이모들과 교래리에 백숙을 먹으러 가고 주말이면 경마장에서 마권을 사던 생활들은 엄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단됐다. 엄마의 바운더리는 그렇게 집과 근린공원, 그리고 병원이 전부가 되었다. 언젠가 엄마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게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거라 했다. 신체적 죽음만큼이나 사회적 죽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때에 통보된다는 걸 엄마를 보면서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앨리스가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연설하는 장면에 감응한다.


한때 우리의 모습에서 멀어진 우린 우스꽝스럽습니다 우리의 이상한 행동과 더듬거리는 말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인식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바꿉니다 우린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집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이죠


엄마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은 자꾸만 할 수 없다 했다. 이모들이 명절 음식을 할 때도 주변에서 경조사 모임을 가질 때도 엄마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아프니까 집에 있어'였다. 배려에서 비롯된 그 말들은 엄마의 정신을 흉 지게 했다. '아프니까 쉬고 있어' 그러면 '아프면 가만히 있어라' 해석했고 '아프니까 내가 할게' 그러면 '아프니까 넌 못해'로 오해했다. 삶은 자꾸만 위축되어 갔고 의지는 자꾸만 빼앗겼다. 엄마는 나에게 컴퓨터 공부를 하고 싶다 했고 꽃꽂이를 배우고 싶다 했는데 그때 복지시설에서 진행하는 수업 하나 알아봐 주지 못한 게 너무 죄스럽다. 엄마가 평생 이룬 많은 것들이 병으로 인해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그때, 난 응원도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할 테니 엄만 가만히 있어라. 그런 시답잖은 소리뿐이었다. 나는 은연중에 엄마를 그저 환자 취급을 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 모두가. 그건 엄마가 아닌 엄마의 병일뿐인데도 우리 모두가 그랬다.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순간을 사는 것과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않는 것


앨리스는 생을 달리고 달려 보지만 알츠하이머에게 뒤처진다. 알츠하이머가 앨리스를 앞지른 순간 그녀는 최후의 수단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병자가 된다. 그래도 여전히 앨리스다. 앨리스를 기억하는 가족들과 앨리스가 기억하는 감정들이 아직 살아있기에 여전히 앨리스다. 그리고 앨리스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건 대학 진학 문제로 계속해서 부딪히는 딸 리디아다. 앨리스와 리디아의 관계성은 엄마와 나랑도 무척 닮았는데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리디아의 장면을 볼 때마다 웃게 된다. 앨리스는 대학에 가라 성화고 리디아는 대학에 안 가도 해낼 수 있다며 짜증 낸다. 어쩜 그리 똑같을까. 그 모녀와 우리 모자는. 

영화 [스틸 앨리스]가 유사한 드라마 장르들과 달리 무엇보다 좋았던 건 담담한 카메라 워킹과 기록적인 장면 연출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앨리스의 기억을 걷는 듯한 장면들을 따르다 보면 이내 감정이 멍울멍울 솟아난다. 순간을 사는 앨리스를 다그치는 일 하나 없이 보듬고 부축하며 다독인다. 고통스럽지만 나아가는 여정만이 있을 뿐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언어학 교수였던 앨리스는 이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로 리디아 곁에 있다. 그래도 리디아에게는 여전히 엄마다. 모든 기억을 잃고 순간을 사는 엄마를 다그치는 일 없이 다정다감한 마음으로 엄마를 돌본다. 하루는 엄마와 함께 공원을 걷고 하루는 엄마를 마주 보고 앉아 책을 읽어 준다. 읽기를 마친 리디아는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닌 앨리스 곁에 앉아 묻는다. 


무슨 얘기 같아요.

그러자 앨리스가 답한다.

여전히 앨리스일 수 있는 이유를 답한다.

러... 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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