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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28. 2024

흘러가게 둔 인생

와일드




16

야성적으로 소리를 질러 본 일이 있는가.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무리한 트레킹으로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부츠 한 짝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린다. 쓸모 없어진 다른 한 짝도 집어던지고는 셰릴은 포효한다. 엿 같은 인생만큼이나 엿 같은 자신에게 고함치듯 야성적으로.


척추암으로 엄마(로라 던)를 잃은 셰릴의 인생은 낭떠러지다. 상실을 메울 길이 없어 마약과 섹스가 주는 일순간의 쾌락을 만족이라 단정 짓고 매일같이 그것들을 찾는다. 중독에 빠진 셰릴은 폐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구멍 곳곳을 채우지만 들어차는 건 불결한 것들 투성이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생 갱생을 위해 PCT 트레킹에 나선다.


엄마가 떠나고 자그마치 1년이다. 난 1년 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한 거라고는 돈을 벌고 쓴 일이 전부다. 엄마 살아생전 부단히 노력하던 글쓰기와 운동, 요리와 청소, 심지어 영화보기까지 모든 게 중단됐다. 셰릴이 상실을 메우기 위해 선택한 중독과 달리 나는 그만두기를 택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왜 살고 있지'라는 자문과 '죽지 못해 살고 있지'라는 자답이 다였다. 열성적으로 일하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지금껏 내가 구축해온 겉치레조차 때려치웠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의 시간은 하기 싫은 것들로 채워졌고 하기 싫으니 그만뒀다. 자그마치 1년이 지난 뒤 나는 폐인이 됐다. 셰릴과는 다른 폐인이. 몸무게는 늘어갔고 체력은 바닥이 났으며 머리는 굳어버렸다. 일기 한 줄 쓰는 것조차 어려웠고 유연하게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다. 1년이란 공백 동안 나는 무수히도 많은 걸 지나쳐버렸고 엄마가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베갯잇에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대고 누워 시시덕거리는 몇 편의 예능을 돌려보던 날. 시궁창 같은 집 냄새에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다. 

집에서 나는 냄새가 좋아야 사람 냄새도 좋은 거야. 

냄새가 좋으면 그만큼 사람이 좋단 거야.

엄마가 내게 자주 하던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는 몸이 아파도 집안일하는 걸 좋아했다.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를 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싱크대에 구부정하게 기대어 설거지를 할 때는 기분 좋다고 실없이 웃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의 엄마를 떠올렸을 때 결코 아픈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엄마는 자신의 손으로 집을 가꾸고 살림을 일구며 환자가 사는 집이 아닌 엄마가 사는 집으로 끝까지 관리했다. 그런 엄마를 닮아 나도 집을 가꾸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버렸다. 난 그때 나를 버렸고 집을 버렸고 엄마조차 버렸다. 꾀죄죄한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앉으니 1년 전의 난 거기 없었다. 나 자신을 잃어본 일이 결단코 없었는데. 갱생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아들로 돌아갈 거야.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거야.

인생 갱생을 위해 필요한 것. 길을 잃은 셰릴이 길을 찾기 위해 택한 PCT 트레킹 같은 것이 필요했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아들로 돌아가려면 뭐든 해야 한다. 딱 하나가 떠올랐다. 글쓰기. 글을 쓰는 나를 사랑하던 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내가 보고 싶은 책이 있다면 꼭 사주었다. 돈을 쥐여줄 때면 항상 책사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고 밥값보다 책값으로 내 살림을 도왔다. 그러니 먼저 책상을 치우고 책장을 정리하자 생각했다.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니 개운했다. 차근차근 나를 찾자고, 나의 냄새를 되찾자고 다짐했다.  


아름다움은 개뿔 또 바윗길이네


바윗길. 셰릴은 트레킹을 나선 첫날부터 난항을 겪는다. 모든 걸 내려놓은 새로운 길인데도 짊어진 짐은 셰릴의 키보다 높다. 가스화기는 고장 나 며칠간을 차가운 죽만 먹어야 했고 들어서는 길마다 험난한 구간의 연속이다. 중단된 것을 가동하는 일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필을 쥐던 손가락은 무뎌졌고 머리는 좀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쓴 전부를 날리는 날이 이어졌고, 영화를 보고도 일말의 감상조차 떠오르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글은 개뿔. 바윗길로 들어선 나는 돌을 어떻게 치우는지 까먹었으니 쓰는 일 자체가 곤욕이었다.   


무슨 생각에 자신했던 걸까

내가 포기해도 화내지 말아 줘


그런데 어쩌나. 계속 걷는 것만이 답인걸. 우회하는 일이 있더라도 포기할 순 없었나 보다. 셰릴은 엉망진창이 된 과거에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 대가에 포기는 포함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포기할 수도 없었다. 죽을 만큼의 갈증에 시달리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극한의 추위를 견디고 공포를 견디며 셰릴은 앞으로 나아간다. 지독하리만치 흉악했던 과거의 페이지를 한 장씩 찢어가며 짐을 줄여간다. 길잡이가 되어준 엄마를 기억하며 상실을 메워간다. 그러니 나도 엄마를 쓰기로 했다.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나의 애도를 일기로 쓰고 엄마가 가르쳐 준 인생관을 되짚었다. 배우 로라 던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자주 돌려본 이유도 그래서다. 우리 엄마의 인생관이 그녀의 대사에 가득했다. 셰릴의 엄마로 등장한 그녀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딸이 무너지지 않게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 했고 

네 최고의 모습을 찾아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라 했다. 

셰릴이 길을 잃을 때마다 엄마는 알게 모르게 그녀를 도왔고 충전의 기억으로 저장되어 여전히 그녀 안의 생을 일깨웠다. 아무래도 그때부터였나 보다. 셰릴처럼 내 안의 엄마를 되살려낸 게. 나는 엄마의 기억을 쓰기 시작했고 '0'으로 시작된 글이 어느덧 '16'이 되어 한 권의 책이 될 정도의 이야기가 되었다. 셰릴이 마주한 위기 상황들과 달리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전부였지만 4,286km를 완주한 그녀처럼 나 역시 걷고 또 걸었다. 우회하는 일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준비단계에만 그치던 내가 시작을 했고 어느덧 결승선 앞에 선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 몬스터라 불리던 셰릴의 짐은 어느새 그녀의 등에 알맞게 매달려 그녀를 지지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져 허기를 달래주고 몸을 데워주고 마음을 채워준다. 4,286km를 걸어온 그녀의 시간들은 추악한 과거의 페이지를 지워내고 성취감 충만한 밑줄 그은 문장으로 다시 새겨졌다. 흘러가게 두되 멈추지 않았으며 길을 헤매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제대로 쓰지 못한 문장들에 머리를 쥐어뜯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지르기를 얼마나 거듭했던가. 무엇보다 엄마가 그리워서, 사무치도록 엄마가 그리워서 울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셰릴은 자신의 인생에 다시금 도착했다. 지금 나의 하루도 많이 변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건 바꾸지 못했지만 필요한 것들로 채워진 책상에서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고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에 한 권 한 권 좋은 책을 더해가는 중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콘서트를 틀어놓고 기분좋게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고 산뜻한 모링가향의 샤워용품으로 말끔히 샤워도 했다. 좋아하는 방울토마토로 이것저것 요리를 해먹고 엄마와 함께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꺼내보고 그 영화들에 대한 감상을 새로 쓰고. 인생이 흘러가게 두되 그만두지는 말자면서 내 최고의 모습을 찾아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를 떠올리며 울기보다는 웃는 일이 늘어갔다. 하기 싫은 일보다 하고자 하는 일이 더해졌다. 영화 끝에 셰릴이 들려주는 그 독백처럼 내 인생은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고 고귀하다는 걸 이제 나도 안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엄마가 엄마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나도 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아들로서 그리고 나로서. 그렇게,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던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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