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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18. 2024

은진이

스탠 바이 미




7

어느 여름 날

공원 그늘에 앉아있던 영희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나뭇잎보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좋다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생은 가냘프고 아리따운 꽃과 같아라





은진이


깊이 잠든 새벽에 전화가 왔다. 평소에는 잘 듣지도 못하면서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급한 벨소리가 꺼지고 떨리는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훈아. 빨리 병원으로 와야 될 것 같아.

검정색 옷을 챙겨야겠다고. 참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검정색 옷을,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서도 가장 단정한 검정색 옷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겠다고 이모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던 이모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는지 곁에 있던 의사에게 전화를 건넸다.

이영희 환자분 아드님 되시죠? 힘드시겠지만 지금 바로 제주로 내려오셔야 할 것 같아요.

난 어쩌면 그때부터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했나 보다고. 평소에는 혼잣말을 그리도 잘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하고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엄마를 보러 가는 길에 단장하던 내 모습 그대로 하나씩 하나씩. 서두르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건 아닌지 지레 겁을 먹기도 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은 잘 닫혀있는지 수도는 잘 잠겨있는지 보일러는 잘 꺼져있는지 확인하고, 런던 여행을 다녀왔을 때 산 검정 구두를 신고서 집을 나섰다. 어슴푸레한 새벽 아침.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는 도로시처럼 예쁜 구두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며 한걸음 한걸음 걸었다. 지하철은 한산했고 자리가 남아있어 편하게 앉아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드문드문 앉아있는 여행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최대한 내 얼굴을 들키지 않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출발까지 1시간 남짓 남아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화 이후로 그날 내뱉은 첫마디는, 

커피 마시고 싶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를 찾는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공항 주변을 기웃거리다 카페 하나를 찾아서 커피를 주문했다. 따듯한 걸 마실까 차가운 걸 마실까 잠시 고민했다. 역시 차가운 게 좋겠다. 아이스커피를 들고서 다시 자리에 앉아 몇 모금 마셨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목을 타고 흐르는 커피가 차가운 가슴에 닿고 따듯한 배에 내려앉으니 엄마 생각이 났다. 눈물이 났다. 엄마를 보러 가는 길인데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다니까 무서웠다. 파르르 손이 떨려왔고 빳빳하게 다리가 굳어갔다. 다시 커피를 마셨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며 몇 번이고 커피를 마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커피를 마시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서 챙겨온 냅킨으로 일회용 컵의 물기를 닦아내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냅킨이 축축한 종이죽처럼 뭉개졌을 때 탑승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무원에게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비행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검정 구두에게 이렇게 빌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빠르게 데려다 달라고. 나를 엄마에게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제주공항으로 사촌 형이 마중을 나왔다. 무덤덤해 보이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형은 계속해서 나에게 괜찮은지를 물어왔다. 괜찮아. 괜찮은 거지. 괜찮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응이랑 그럼 정도. 응. 응. 그럼. 그럼. 그 순간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앞 유리에 후두두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누군가 대신 울어주는 듯한 그 빗소리였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며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다시 한번 전화가 왔다. 은진이. 세계 일주를 떠난 내 친구. 겨우겨우 비가 대신 울어주는데 전화를 받으면 또 울 것 같아서 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른다. 찬찬히 전화를 받은 나에게 은진이가 물었다.

괜찮아?

비행기 안에서 겨우 추스른 마음이 다시 무너져내렸다. 괜찮은지를 물어오는 친구의 말에 무너진 게 몇 번이나 될까. '괜찮아'는 세상에 수두룩하다. 일생 동안 친구들은 수많은 '괜찮아'를 물어왔고 그럼 나는 수많은 '괜찮아'를 답해왔다. 괜찮아란 질문에 괜찮아란 답을 해온 건 어쩌면 내 이름만큼이나 많이 듣고 답한 안부였으리라. 그날의 은진이는 은진이가 걸어 다닌 세상만큼의 '괜찮아'를 물어왔다. 그 한마디에는 여태껏 은진이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낀 세상의 온정이 담겨있었을 거라고. 


지훈아. 오늘 하루는 어떠니. 혹시 울고만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세상 곳곳에서 내가 본 것들을 너에게 보여줄 순 없지만 언젠가 들려줄 순 있겠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너희 어머니에게도 들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지훈아. 혹시라도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그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너만은 무너지지 마. 너만은 듣고 너만은 재미있게 웃어줘.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너희 어머니에게 대신 전해줘야 해. 참으로 긴긴 이야기가 될 거야. 내 여행 이야기도 그렇겠지만 지금껏 함께한 너와 나의 인생 이야기도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한 너희 어머니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줘. 그러면 그때는 너를 대신해 웃고 울고 할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너를 보며 너희 어머니를 떠올릴게. 그러니까 지훈아. 걸어. 계속 걸어. 그리고 엄마에게 가. 엄마를 마지막까지 지켜드려. 너는 할 수 있어.


이 모든 게 은진이의 '괜찮아'에 담겨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눈물은 어디서 찾아온 걸까. 나를 대신해 울어주는 차창 밖의 비만큼 은진이와 나도 울었다. 왜 우냐 그러면 너는 왜 우냐 묻고 그만 울자면서도 계속 눈물이 나는데 어떻게 그만 우냐 그랬다. 도무지 걸어서는 당도할 수 없는 세상에 있으면서도 은진이는 여기 오겠다 했고 나는 이미 네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으니 거기 있으라 했다. 그다지 많지 않은 안부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전화를 끊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울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은진이와 통화를 했던 그 차 안은 정말 기쁜 시간이었다. 주위에선 정겨운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고 전화를 갖다 댄 귀는 무척이나 따듯했거든. 함께 울어서 퉁퉁 부은 너와 나의 눈도 참으로 아름다웠을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는 그랬겠지. 괜찮다고. 그 마음 다 아니까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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