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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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름은, 엄마
나에게는 영원히, 엄마 _
나 태어나 걷고 말할 때부터 엄마는 아파서,
당신의 행복 하나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아파서,
오로지 나를 만난 것만이 행복이라 말하는 게 너무나 아파서,
그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서,
나는 엄마에게 이름 하나, 그러니까 '영희'로서의 행복 하나 안겨주지 못한 '아들'로 남겨져 나 역시도 계속해서 아픈 것 같아.
갑작스러운 엄마의 수술이 있었다. 암이 자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엄마가 밥을 먹으면 배가 아플 정도로 그 고통이 심해져 뱃속의 것들을 수술로 모두 꺼내야 한단다. 하루 종일 일이 잡히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일뿐이었기에 그저 일을 했다. 엄마의 수술이 무사히 끝날 거라고 빌고 또 빌며 그저 일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에 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기만을 바랐고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입원실로 돌아와있을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상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웃었다. 계속 웃었다.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_ 그리고 내가 슬픔을 꺼내버리면 그 슬픔이 진짜가 되어버릴까 봐 그냥 웃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적막한 스마트폰을 쳐다보다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싶어 집 근처에서 김밥을 샀다. 항상 잘 먹고 다니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밥을 샀다. 먹고 있으면 엄마가 이제 괜찮다며 전화가 올 것 같아서 김밥을 샀다. 온 세상이 내 기도를 들어준 걸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술을 잘 끝마쳤다는 소식과 함께 엄마의 암이 전이가 됐다는 불운도 들려왔다. 담담하게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의사에게 물었다. 앞으로 식사를 하는데 문제는 없을까요. 혹시 엄마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 수 있을까요. 식사를 하는데 문제는 없을 거라 했고 앞으로의 시간은 알 수 없다 했다. 알 수 없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알 수 없다는 건 미지수고 미지수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이 엄청난 절망이 희망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희망은 널리 퍼트려야 한다. 엄마를 걱정하고 있을 숙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차게 전화를 받는 숙모의 목소리 덕인지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암이 전이가 됐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시간이니까. 같은 하늘 아래 엄마가 있고 아직 숨결은 흐를 테니까. 나는 그 숨결을 떠올리며 숙모에게 희망을 전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전화 끄트머리에 숙모가 남긴 '훈아. 걱정 말고 있어.'라는 말이 왜 그리도 슬펐을까. 끝인사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울었다. 잘 버티고 있었는데 그냥 울어버렸다. 울고 울고 우는데 눈물이 뜨겁다가 차갑다가 그랬다. 휴지로 눈을 꾹 누르고서 그만 울어야 한다 그만 울어야 한다 몇 번을 되뇌는데도 흐르고 또 흘렀다. 흐르기만 했다. 조금의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노트북을 켜고 있더라. 정말 모르겠다. 나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떠올려보니 아마 엄마에게 한 약속, 그러니까 내 자신이 엄마를 위해 한 약속이 불현듯 떠오른 것인가 보다고. 분명 나는 엄마가 '한 편의 영화가 되어버리기 전'에 엄마를 위한 책을 쓰겠다고. 나를 위한 게 아닌 엄마를 위한 책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한동안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야 이렇게 뭐라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지만 후회는 하지 않겠다. 반성을 하며 지금이라도,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이라도 엄마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며 이렇게 눈물을 멈추고 나는 남기고 있다. 내가 만난 엄마를 말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시간을 벌어준 엄마를 말이다.
김밥은 먹지 못했다. 뭐든 잘 먹고 다녀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너무나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이게 먼저인 것 같아서 글을 썼다. 그리고 엄마를 위한 영화를 틀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려고 했다.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지금 이 영화를 본다는 건 슬프기만 할 테니까. 다른 걸 보자고.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 그것도 아니면 좀 더 밝은 영화,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엄마와 함께 즐겼던 영화를. 또다시 슬펐다. 세상에는 이토록 영화가 많은데 내가 엄마와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영화는 손에 꼽힐 정도니까. 영화 [스피드]를 틀까. 나 스무 살 어느 새벽에 함께 OCN에서 본 이 영화를 엄마는 무척 좋아했다. 제목을 잘 기억해두지 않는 당신 성격 탓에 매번 나에게 그 영화가 뭐냐 묻기도 했었다. 영화 [페이스오프]도 그랬고 영화 [미션 임파서블]도 그랬다. 눈이 침침하다면서 그 자막들은 어떻게 다 읽는지 외화를 좋아하던 엄마는 그중에서도 긴장감 넘치는 범죄 스릴러나 첩보물이 재미있다 했다. 그러고 보니 나 중학생 때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극장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 [미녀 삼총사]였을 거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그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보고 또 보는 걸 좋아하는 나인데 그중에서도 영화 [미녀 삼총사]는 정말이지 수도 없이 돌려 본 것 같아. 마치 엄마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금에 내가 틀 수 있는 건 어떤 영화일까. 지금 엄마가 곁에 있다면 함께 보고 싶은 영화는 무엇일까. 그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일 수도, 엄마의 두 번째 암 투병과 함께 시작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영화들도 아닌 것 같아. 비교적 최근 영화는 없을까 싶은 와중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너의 이름은]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겠다. 그냥 이 영화를 틀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엄마의 이름은, 나에게 엄마의 이름은 엄마라는 게 섬광처럼 스쳤다.
무스비. 나는 여전히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 말하는 무스비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극장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래서 무스비가 뭔데', '그것도 무스비'라며 가까운 지인들과 장난치던 기억 말고는 여전히 아는 게 없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 이미 이 영화를 다시 보기도 했다. 그때 되감았던 이 영화를 지금 떠올려 보니 처음 봤을 때보다 뭉클했고 또 어딘가 맑았다. 그래. 맑았다. 그래서 이걸 고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엄마의 마지막 날은 맑았으면 좋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했었다. 그 어떤 '맑음'이 나는 이 영화에 있다고. 분명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맑음 또한 무스비. 엄마와 나를 이어주는 영화가 바로 그것은 아닐까.
언젠가 엄마가 영화가 되어버린 순간, 나에게 진정으로 엄마는 영화로 기억될 테니 많이 모으자고. 지금은 비록 함께 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함께 보는 거라고 떠올릴 순 있을 테니까. 나는 영화 [너의 이름을]을 다시 보며 이 글을 쓴다. 맑고 깨끗한 도시의 풍경 속에 나란히 선 타키와 미즈하. 저리도 싱그러운 소년 소녀가 서로를 찾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엄마도 나를 만나기 전에는 저렇게 누군가를 향해 달리고 달렸을 텐데. 이제는 스쳐 지나간 엄마의 인생이라지만 나는 엄마가 소녀였을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땐 엄마에게 '영희'라는 소녀의 설렘과 행복, 그리고 남모를 사랑과 원대한 꿈도 있었겠지. 점점 사그라드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걸 엄마에게 어떻게 꺼내줄 수 있을까. 이 글이 그걸 꺼내줄 수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아니. 아주 잠시라도. 연락이 끊긴 미즈하를 찾기 위해 세상 곳곳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타키처럼 나도 엄마를 위해 무수히 많은 영화라는 세계로 뛰어들고 발견하고 또 건네주고.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 병실에 누워있을 엄마에게 이토록 맑고 희망찬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그럼 아마도 같이 웃고 울겠지. 내가 눈물이 많은 건 엄마를 닮았으니까. 안타깝게도 웃음이 적은 것 또한 엄마를 닮았지만 그래도 우린 같이 웃었을 거야. 그런 생각도 들더라. 언젠가 나도 엄마와 꿈으로 연결되어 소녀 시절의 엄마를 경험해 본다면 기쁠 것 같다고. 아름다울 것 같다고. 사랑스럽고 우아하고 그리고 또 행복하게 슬플 것 같다고. 그럼 난 엄마의 이름을 기억해두고서 누군가 불러주는 엄마의 이름 '영희'를 정겹게 듣고 또 스스로도 살갑게 불러주고 싶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왠지 모르게 울고 있다.
그런 일이 종종 있다.
꿈을 꾸긴 했는데 매번 기억이 안 난다.
단지,
뭔가 사라져버렸다는 느낌만이
잠에서 깬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다.
/ 영화 [너의 이름은] _ 타키
유성은 떨어진다. 유성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순 없다. 엄마와 나의 이별도 그런 일이겠지. 언제가 됐든 엄마는 나에게 영화가 될 테고 먼 훗날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느낌만이 오래도록 남겠지만 기억할 거야. 나는 기억해 내고야 말 거야. 전화기 너머로 부르는 '엄마'처럼 나는 몇 번이고 엄마를 부르고 기억할 거야. 그리고 지금 분명한 건 우린 내일도 통화하며 아들은 엄마를 부르고 엄마는 아들을 들려줄 거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 그러니까 엄마. 우리 내일도 통화해. 내가 내일도 맑게 갠 도시를 걸으며 사랑한다고 들려줄게.